작가 소개
About Artist
손승현
Sohn, Sung Hyun
孫昇賢(ソン·スンヒョン)
사람과 그 주변에 대한 관심으로 사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인을 비롯한 몽골리안의 역사, 사회,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시각예술작업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북미 원주민 공동체에 깊숙이 들어가 이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 해마다 몽골과 북미 여러 곳을 여행하며 주된 작업인 사진작업과 글쓰기를 통하여 기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폭넓은 이야기와 현실 문제에 대한 문명비판도 병행하고 있다. 2002 광주 비엔날레를 비롯해 뉴욕, 이탈리아, 독일, 일본, 중국, 호주,몽골 등지에서 80여 차례 전시에 참여했고 국내외의 여러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은 책으로 미국 원주민의 이야기인 『원은 부서지지 않는다 (The Circle Never Ends)』(아지북스, 2007)와 『제 4 세계와의 조우 (Close Encounters of the Fourth World)』(지오북, 2012), 사진집으로『밝은 그늘 (Bright Shadow)』(사월의 눈, 2013), 삶의 역사- 안산, 홋카이도, 사할린, 그리고 타슈겐트 (한양대학교 글로벌 다문화연구원, 2015) 그리고 공역서로 원주민 구전문학인 『빛을 보다 (Coming to Light)』(문학과지성사, 2012)가 있다. 한국 시각인류학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뉴욕을 기반으로 하는 초상사진가 그룹 누토피아 포럼(Nutopia Forum)의 멤버이다. 현재 한국인의 근대와 이산문제, 제 4세계 사람들(선주민)에 대한 광범위한 사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시 소개
About Exhibition
잊혀진 사람들
Forgotten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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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coming
손승현(전시총괄)
사람이 세상에 와서 살아갈때 사회 공간 속의 많은 제도,환경과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나는 그 동안 한반도에서 태어나
한국을 떠났거나 오랜 시간 지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나의 궁극적 관심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모습들과 사람들에게 그런
사회적 삶을 살게 하는 사회적 환경, 제도들이다. 한국인들이 각기 고향을 떠나 살아가야 했던 낯선 이방인의 땅, 각기
다른 사회 속 제도와 관습, 권력 등은 사람의 모습과 얼굴모양 마저도 바꾼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사진들은
지난100년 동안 미국을 포함해서 일본, 중국, 러시아, 사할린, 중앙아시아 등 세계곳곳을 떠돌아 다니면서 살아야만
했던 기구한 운명의 한국 사람들의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인물기록사진이다. 현실의 삶이 척박하고 힘들고 괴로워도
아름다움과 결합될 때 긍정적 효과와 연결된다는 생각을 사진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이번 온라인 사진전은 유럽, 아메리카, 러시아 사할린 동포, 중앙아시아 고려인 동포들, 조선족 동포, 북한 이탈
주민들(새터민), 재일동포들을 비롯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초상이 전시된다 또한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한국사회에서 합법적인 국민으로 살아왔지만 냉전과 분단이라는 한국사회의 암울한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로 인식되어온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가 사진으로 전시된다. 전시는 한국에서 이주한 다른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한국 이주민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다양한 문화계층이 공존해 살아가는 한국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다. 전시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오랜 기간 타국에서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 코리안 디아스포라 인들의 이야기와 초상을 기록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여년간 기록한 “잊혀진 사람들”,
“사사노보효전시관 강제노동 아카이브 전시”,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등 4개의 사진작업이
전시된다.
지난 20여년간 조국을 떠나 타국의 삶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수많은 한국인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수백명 한명 한명의 이야기가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작가로써 가졌던 질문들 인간이란 과연 무었일까?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에 대한 나의 기대를 몇 십배 넘어가는 놀라운 삶의 이야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울었고 그 삶들로부터 여러가지 배울수 있었다. 이제는 작고 외소해진 사람들의 살아온 과거 이야기를 듣고나면 그들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그 삶들에 대한 존경으로 진심으로 안아드리고
위로드리고 싶은 사람들로 보였다. 내 가슴속에서 반응한 것은 이 사람들의 놀라운 ‘생명력’ 이었다. 감당하기 불가능한
힘들고 어려운 선택이 인생의 매 순간 다가와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사람들의 얼굴은 삶의 지도와 같았다.
사진을 통해 이 사람들의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부분의 삶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자 사진작업을 해왔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우리들이 오늘날 그 속에서 살고있는 “비상사태 the state
of Emergency” 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라 항상 같이 한다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잊혀진 사람들
Forgotten People
손승현
Sohn, Sung Hyun
제2차 세계대전당시 일본식민하에 있던 한반도에서는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탄광, 기지건설,
군인으로 강제로 끌려가야만 했다. 전후 일본정부는 전쟁 때 희생된 수많은 강제 징용 희생자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일본 곳곳에 버려두었다. 그들은 한일정부의 무관심 속에 잊혀져 갔다.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유골을 그들의
고향으로 되돌려 주려한 일본시민, 종교인에 의해 어둠 속에 잊혀진 희생자는 다시 빛을 보게 되게 되었고 한 많은
유족들을 찾아 유골을 돌려주고 위로해 주는 일이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연합군 포로나 중국의 징용자 유골은 오래 전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식민지 조선 출신의
희생자들은 죽어서도 차별 받았다. 심지어 군인으로 징병된 희생자들은 유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로
합사시켜 버렸다. 홋카이도는 14만 5000명의 조선인 징용기록이 있고 확인된 희생자만 수 천명에 이른다. 홋카이도의
강제노동 희생자 발굴은 1976년 도노히라 스님(전 일승사 주지스님)의 우연한 슈마리나이 폐사찰 (광현사, 현
사사노보효전시관) 방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스님이 만나게 된 80여개의 우류댐 희생자 묘표로부터 홋카이도 강제징용
희생자 발굴 작업은 조사, 시작되었다. 1970, 1980년대 지역단체인 '소라치 민중사 강좌’ 회원들을 중심으로 유골발굴을
진행했고 많은 유골을 발굴해 한국으로 유족과 연락하고 희생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이후 1997년 한,일
공동 워크숍으로 더 많은 양국 시민 학생들이 만나면서 희생자 발굴작업은 더 큰 규모로 이루어졌고 지난 20여년간
공동작업이 되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고 역사의 진실을 만나는 교류의 장이 된 것이다.
"70년만의귀향작업" 은 홋카이도에서 그간 발굴된 유골과 인근 사찰에 보관중인 유골 115구를 희생된 징용자들이 끌려간
그 길을 되돌아오는 여정으로 송기찬 교수에 의해 기획되었다. 한국에서 출발해 돌아오기까지 3,800킬로미터 열흘간의
여정은 2015년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에 실행되었다. 비행기로는 세관, 검사 통관 등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기에 버스와
배를 통한 여정으로 구체화되었다.
여정의 시작은 홋카이도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아사지노 일본 육군 비행장 강제노동 희생자 34구의 유골을 임시로
안치해 둔 북쪽 마을 절에서 추도식이었다. 이곳에서 슈마리나이 광현사를 들러 4구의 유골을 모시고 비바이시의
미쯔비시 탄광에서 희생된 6구의 유골(조선인 5000명의 징용자 기록)과 정토진종 삿포로 별원에서 합골된 유골중 남한
출신 희생자 유골 71구를 분골해 모시고 여정을 떠났다. 삿포로 남단 토마코마이 항구에서 도쿄인근의 오오아라이
항구를 출항했다. 징용자들이 끌려간 바닷길을 따라갔다. 당시, 징용자들은 두 번의 바다를 건너며 절망 했다고 한다.
도쿄와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끼를 들리면서 희생자들이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감을 알리고 과거의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귀향단은 시모노세키에서 무사히 대한 해협을 건너 부산 항에 도착했고 노제를 올리고 장례식이 거행될 서울 시청
광장으로 이동했다. 많은 자원봉사자와 유족들 그리고 시민들이 참여한 장례식을 치른 뒤 유골은 화장을 거쳐 파주
시립묘역에 안장 되었다. 아직도 일본 전역에는 수만의 방치된 강제 징용 희생자 유골이 방치되어 있다. 더 늦기 전 에
서둘러 옮겨와야 한다. 양국 정부가 못한다면 "잊혀진 사람들"처럼 양국 시민의 힘으로 진행하면 된다. 유골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주는 일은 인간으로써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종교인, 활동가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잊혀진 사람들
손승현
2022 일우사진상 올해의 작가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전
《잊혀진 사람들》
손승현
2022.06.15 – 2022.08.02
아시아태평양평화기념관, 제2기념관
www.asiapacificpeacememorial.com
전시총괄 손승현
주최/주관 일우재단
후원 한양대학교 글로벌 다문화 연구원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사회 공간 속의 수많은 제도와 환경과 관계를 맺는다.
나는 한반도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을 떠난 사람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기록해 왔다.
나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모습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게끔 하는 사회적 환경과
제도들이다. 한국인들이 고향을 떠나 살아가야 했던 낯선 이방인의 땅, 각기 다른 사회 속 제도와 관습, 권력 등은
사람의 모습과 얼굴 모양마저 바꾼다.
이번에 전시하는 사진들은 지난 100여 년 동안 미국을 포함하여 일본,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한국인의 역사적 증언이자 기록이다. 나는 사진을 통해 현실의 삶이
척박하고 힘들고 괴로워도, 아름다움과 결합할 때 긍정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다. -손승현-
손승현 개인전 《잊혀진 사람들》은 2022년 일우 사진상 올해의 작가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 전시로, 유럽, 아메리카,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 북한 이탈 주민(새터민) 등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초상을 보여준다. 전시는 한국
사회에서 합법적인 국민으로 살아왔지만, 냉전과 분단이라는 한국의 암울한 근현대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소수자로
인식되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고 있다. 《잊혀진 사람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오랜 기간 타국에서, 그리고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이야기이며,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문화
계층이 공존하는 오늘날 한국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번 전시는 크게 네 개의 주제-〈삶의 역사〉, 〈우리는 고려 사람〉, 〈남쪽과 북쪽, 코리안 아메리칸〉, 〈경계,
조선학교〉-로 구성되어 있다. 〈삶의 역사〉는 국경을 넘는 한국인의 삶의 얼굴을 대형 초상 사진으로 설치해
보여준다. 〈우리는 고려 사람〉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변방의 기록이 되어버린 중앙아시아 동포들의 이야기를,
〈남쪽과 북쪽, 코리안 아메리칸〉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재미동포의 이야기를 담는다. 마지막으로
〈경계, 조선학교〉는 재일 코리안 공동체에서도 마이너리티 공동체인 조선학교를 주제로 민족 정체성의 과제를 어떻게
교육하고 강화하는가를 보여준다. 전시는 제2기념관의 4개 공간에서 진행되며, 총 167점의 사진과 5점의 영상으로
구성된다. 또한 각 작품 해설을 통해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의 궤적에 관한 이해를 돕는다.
아시아태평양평화기념관 제2기념관 야외전시실에 설치된 〈삶의 역사〉는 약 20여 년간 작가가 ‘직접적’ 접근 방법으로
기록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생애와 삶의 기억, 그리고 이들의 현재 모습이 담긴 대형 초상 설치 작업이다.
냉전체제 붕괴 이후 가속화된 글로벌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짧은 기간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뤘다. 이 과정에서 정치,
경제, 역사적인 이유로 타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생겨났다. 여전히 그들은 해외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다시 한국 사회로 돌아온 이들도 있다. 이들은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중국, 북한 등으로의
이주와 이산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지만, 오랜 기간
타국살이를 하면서 체화한 타민족의 문화로 인한 괴리감을 가진 채, 한국 사회 내부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지금의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경을 넘는 한국인의 삶의 얼굴〉은 러시아 사할린 동포, 재미 동포,
재일 동포, 중앙아시아 고려인 동포들, 조선족 동포, 북한 이탈 주민들(새터민) 등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얼굴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합법적인 국민으로 살아왔지만, 냉전과 분단이라는 암울한 근현대사 속에서 소수자로 인식되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제2 기념관의 첫 번째 전시실에 설치된 〈우리는 고려 사람〉은 한국과 중앙아시아에서 촬영한 고려인 동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고려인 강제 이주’의 역사에서 시작한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다. 같은 날 ‘고려인 강제 이주’에 대한 결의문도 채택되었다. 고려인 주거지에 일본 첩자의
침투와 내통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원동(연해주)에서 6,000km 떨어진 반(半) 사막지대인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벌판으로 171,781명이 강제로 옮겨졌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다양한 민족
또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 흐루쇼프 시대인 1957년 이후, 강제 이주되었던 이들은 러시아
연해주나 우크라이나, 체첸으로 귀향했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노동 이주 등의 형태로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로 이주했지만, 이들의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공통의
기억은 1937년 시행된 ‘강제 이주’다. 강제 이주 이후 형성된 다문화 사회, 다문화 집단 농장에서의 다민족 문화의
경험, 사회주의에서의 생활 경험은 이들이 새롭게 이주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동체 생활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고려인과 유대인, 쿠르드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체첸인들은 결혼과 다양한 형태의 교류를 통해 이웃과 가족이 되었고
새로운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경기도 안산 원곡동으로 이주한 많은 고려인 후손을 둘러싼 다문화의 삶은 이미 그들이
살던 국가에서 경험한 일상적인 삶의 형태이며, 의식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제2기념관 두 번째 전시실에 설치된 〈남쪽과 북쪽, 코리안 아메리칸〉은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50여 명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의 현장을 기록한다. 이 이야기는 1903년에서 시작한다. 그 해, 인천에서 출발해
하와이로 가는 배에 한국인들이 타고 있었다. 더 나은 삶을 약속하는 광고를 보고 인생을 기탁한 수백의 한국인을
기다리던 것은 고국보다 더욱 고단한 이방의 땅에서의 삶이었다. 첫 한국 이민자들은 하와이뿐 아니라 미국의 동부,
서부로 퍼져나갔고, 현재 약 200만 명의 소수 마이너리티를 형성하고 있다. 선대의 희생 속에 이주 3, 4세대 후손들은
아메리칸 대륙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일구며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들 삶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들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는 한국 현대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모순을 그대로 닮아있다.
제2기념관 세 번째 전시실에서는 〈경계, 조선학교〉를 만날 수 있다. 약 750만 명의 재외 동포 중 약 80만 명 정도가
현재 일본에 살고 있다. 일본과 중국, 중앙아시아 재외 동포의 긴 이주 역사의 배경에는 일제 식민 지배의 어두운
역사가 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에 남은 재일 동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일본 사회의 냉대와 차별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재일 동포들은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한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못했다.”
일본 사회의 차별과 배제 속에서 재일 동포 스스로가 민족 문화와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운 학교가 바로
조선학교다. 조선학교는 일본 전역에 60개가 넘는 학교를 보유한 가장 큰 외국인 학교다. 대학을 통해 교사를 길러내는
능력과 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디아스포라 교육기관이다. 〈경계, 조선학교〉의 사진 작업은
조선학교의 교육과정과 실천이 어떠한지를 기록하고 살펴본다.
《잊혀진 사람들》은 손승현 작가가 지난 25년여간 듣고 기록한, 조국을 떠나 타국의 삶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수많은 한국인의 이야기다. 이들 수백 명의 이야기가 담긴 사진은 그저 한 장의 기록된 이미지가 아니다. 사진
한 장 한 장은 작가로서 가진 질문-‘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한 명 한 명의
대답이며, 놀라운 생명력의 표상이다. 작가는 인생의 매 순간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운 선택이 다가와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사람들의 얼굴은 삶의 지도와 같다고 말한다. 역사를 통과하면서 ‘잊혀진 사람들’의 얼굴을 지도 삼아,
보이지 않는 삶의 본질에 한 걸음 다가가길 기대한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우리들이 오늘날 그 속에서 살고있는 “비상사태 the state
of Emergency” 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라 항상 같이 한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작가소개
Artist
손승현
사람과 그 주변에 대한 관심으로 사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인을 비롯한 몽골리안의 역사, 사회,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시각예술작업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북미 원주민 공동체에 깊숙이 들어가 이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 해마다 몽골과 북미 여러 곳을 여행하며 주된 작업인 사진작업과 글쓰기를 통하여 기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폭넓은 이야기와 현실 문제에 대한 문명비판도 병행하고 있다. 2002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뉴욕, 이탈리아,
독일, 일본, 중국, 호주, 몽골 등지에서 90여 차례 전시에 참여했고 국내외의 여러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은
책으로 미국 원주민의 이야기인 『원은 부서지지 않는다(The Circle Never Ends)』(아지북스, 2007)와 『제4세계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Fourth World)』(지오북, 2012), 사진집으로 『밝은 그늘(Bright Shadow)』(사월의 눈,
2013), 『삶의 역사- 안산, 홋카이도, 사할린, 그리고 타슈겐트』(한양대학교 글로벌 다문화연구원, 2015) 그리고
공역서로 원주민 구전문학집 『빛을 보다(Coming to Light)』(문학과지성사, 2012)가 있다. 또한 한국 시각인류학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인의 근대와 이산문제, 제4세계 사람(선주민)에 대한 광범위한 사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www.shsohn.com
@sunghyunsohn
개인전(24회)
2021 《70년 만의 귀향: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온라인 전시 www.70yearhomecoming.com
2019 《70년 만의 귀향》, 1928 아트센터, 서울
2018 《70년 만의 귀향》, 스페이스 푸렛푸, 후카가와, 홋카이도, 일본
2017 《기억이 살아있으면 그 사람은 살아있다》, 강동아트센터 갤러리, 서울
《Waking the Ghosts of War: From Rancor to Recognition in East Asia》, Brooks Hall, University of Virginia,
미국
《Homecoming》, 복합공간 소네마리, 수유너머 104, 서울
《Waking Japan's War Ghosts: Recognition, Remorse, and Reconciliation in East Asia》, Booth Library, Eastern
Illinois University, 미국
2016 《Homecoming》, 일리노이 대학 YMCA 머피갤러리, 미국
《기억의 예술-70년 만의 귀향》, 프란치스홀, 성공회주교좌성당, 서울
《70년 만의 귀향》, 삿포르 서본원사, 홋카이도, 일본
2015《삶의 역사_70년 만의 귀향》, 서울도서관(구 서울시청사), 서울
《70년 만의 귀향》, 일승사, 홋카이도, 일본
《삶의 역사_안산》, 홋카이도, 사할린 그리고 타슈겐트, 한양대학교 글로벌 라운지 갤러리, 안산
《70년 만의 귀향》, 프란치스홀, 성공회주교좌성당, 서울
《삶의 역사_ 나는 미래다》, 안동 문화예술의전당 상설 갤러리, 안동
《삶의 역사_나는 미래다》, KF한국 국제교류재단 갤러리, 서울
2014 《밝은 그늘》, 갤러리 사각형, 서울
2013 《삶의 역사》, 한양대학교 글로벌라운지 갤러리, 안산
《원은 부서지지 않는다》, 싯팅불 대학, 포트에이츠 노스다코다, 미국
2012 《삶의 역사》, 플래툰 쿤스트할레, 서울
《삶의 역사》, 한양대학교 글로벌라운지 갤러리, 안산
2005 《통일의 집》, 메이슨그로스갤러리, 뉴 브런스윅, 뉴저지, 미국
1999 《그늘진 낙원》, D. M. Z, 민통선 내 구 노동당사, 철원
1991 《마음의 공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갤러리, 안성
주요 그룹전(60회)
2019《One Shiny Day》, 인도국립현대미술관, 뉴델리, 인도
《ILFORD CCP Salon》, Center for Contemporary Photography, 멜버른, 호주
《1919년 3월1일 맑음》, 대구시립미술관, 대구
2018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SEMA 벙커, 서울시립미술관, 여의도, 서울
2017 《국가, 개인 그리고 우리》, 서울사진페스티벌, 북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7 동강사진페스티벌 주제전《나는 갈등한다, 고로 존재한다〉, 동강사진미술관, 영월
2016 《Xishuangbanna Photo Festival》, 중국
2015 《로봇은 진화한다》, KAIST+대전시립미술관, GS칼텍스 예울마루 갤러리, 여수
2014 《역사와 기억》, 미술관속 사진페스티벌,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인공의 뇌, 로봇은 진화한다》, 대전시립미술관, 카이스트, K-Space, 대전
《다큐멘터리 스타일》, 고은사진미술관, 부산
《누락된 기록 – 증언의 힘》, 갤러리EMU, 서울
2013 《누락된 기록》, 경기도 나눔의집,
서울사진페스티벌 《초상의 시대, 시대의 초상》,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전주국제사진페스티벌 《WAR +MEMORY》,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 전주
창원아시아미술제 현대미술전 《오래된 미래도시》, 성산아트홀, 창원
《K Graphics》, 갤러리 원, 서울
2012 《공. 터》, 청주 연초제조창, 청주
《인천을 보다》, 부평아트센터, 인천
《찰나생 찰나멸》, 아르코미술관, 서울
2011 《Ksana》, 자나두갤러리, 울란바타르, 몽골
《Ksana》, 남고비미술관, 달란자드가드, 몽골
《당신의 텍스트》, 갤러리 27, K-SAD, 경기도
2010 《Redesigning the East》, 뷔르템 베르기셔 쿤스트 페어라인, 슈투트가르트, 독일
《상.상》, 제로원디자인센터, 서울
《그래픽 메소드》, 갤러리미엘, 서울
2009 《Made in Korea》, 하노버산업 박람회 특별전, 하노버, 독일
《상.상》, 목인갤러리, 전시 및 소리 퍼포먼스, 서울
《Hangeul》, 볼로냐시청사갤러리, 이탈리아
2008 《오월의 사진첩》, 광주시립미술관 금남로 분관, 전주 소리 문화의 전당, 광주
2007 《Imagination, Action》, 광화문갤러리, 서울
《움직이다...》, 세종문화회관, 코엑스, 서울
2005 《RCIPP 뉴 프린트》, 메이슨그로스갤러리, 뉴 브런스윅, 뉴저지, 미국
2004 《Unbroken》, 데니스비브로파인아트, 첼시, 뉴욕, 미국
《Last Summer》, 타임스퀘어로비갤러리, 타임스퀘어, 뉴욕, 미국
2002 광주비엔날레프로젝트 《3-집행유예》, 5.18 자유공원, 광주
기술노트
Technical Notes
사진 작업을 할 때 촬영하는 피사체에 따라 적합한 카메라를 고르게 된다. 나는 현장에서 피사체와 대면했을 때,
본능적이고 빠르게 촬영할 수 있도록 조작이 간편한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거리에서 촬영하는 사진, 정교한
밝은 빛으로 만드는 초상 사진,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응시하며 촬영하는 풍경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각각에 적합한
카메라가 필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의 카메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도 종종 일어난다. 이번 전시 《잊혀진 사람들》은
지난 20여 년간 촬영한 사진을 선별하여 구성했다. 사진을 촬영하는 것만큼이나 촬영한 사진을 다시 살펴보고 하나의
주제로 편집하는 일은, 작가로서 강조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과정이다. 전시와 사진집을 만드는
과정은 낱장의 사진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시보다는 많은 내용을 중첩하여
다룰 수 있는 사진집이나 온라인 매체를 선호한다.
카메라를 선택할 때는 여정과 피사체에 따라서 결정한다. 이번 작업에서 카메라를 정하는 기준은 ‘조작이 간단한가’,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가’를 우선으로 삼았다. 그리고 주변의 도움이 있을 때는 여분의 중형 필름 카메라나 조명을
사용해서 초상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스냅 촬영은 ‘Sony A7R, Zeiss Sonnar T* 35mm’를 사용하다가 2016년경부터
‘Leica X’를 사용했다. 라이카에서 가장 조작이 간단하고 35mm 고정 렌즈로 만들어진 이 카메라는 움직이는 피사체를
담기에 아주 좋다. 특히 흑백사진에 잘 맞는 톤을 표현한다.
지금은 ‘라이카 Q2와 모노크롬 바디’를 사용해서 촬영하고 있다. 초상 사진은 대부분 ‘핫셀블라드(Hasselblad
553ELX)’를 사용했고, 클로즈업 사진은 ‘80mm Carl Zeiss planar’와 ‘120mm Carl Zeiss Makro Planar’를 사용했다.
풍경과 초상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은 ‘40mm Carl Zeiss Distagon Lens’와 ‘Carl Zeiss Distagon T* 50mm’를 교차
사용했다. 초상 촬영에 때때로 필요한 전기 플래시는 ‘Profoto 7B’를 사용했고, 조명은 배터리로 충전할 수 있어 여행
시 가지고 다니기 용이한 ‘Profoto Acute B600’을 사용했다. 이 조명은 크기는 작지만 광량이 아주 강해서 야외에서
깊은 심도로 촬영이 가능하다.
코리안 아메리칸 초상 작업은 4x5 inch 대형 카메라와 야외 플래시를 사용해 촬영했다. 대형 카메라는 촬영 대상을
천천히 관찰하면서 촬영할 수 있다. 필름 매거진의 필름 장착부터 촬영 후 현상까지 많은 수고로움이 따르지만 정말
무거운 밀도의 사진을 만들어 내는 장점이 있다. 대형 카메라는 수동초점 방식이고 몇 번씩 루뻬로 초점 스크린의
초점을 확인한다. 1990년대부터 사용했던 필름 카메라 ‘Hasselblad’와 ‘Mamiya7, 43mm, 65mm, 80mm’을 이번에도
사용했다. 이 카메라들은 모두 초점을 수동으로 맞추는 방식이다. 필름 카메라를 아직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뷰파인더에 오랜 기간 적응된 내 눈 때문으로, 촬영할 때 원하는 모습으로 편안하게 촬영을 진행할 수 있다. 중형
카메라에는 흑백, 컬러필름을 모두 사용한다.
흑백필름은 ‘코닥 트라이 엑스(Tri-x)필름’을 사용했고 컬러필름은 ‘코닥 포트라 Portra 160NC’를 선호한다. 트라이
엑스 필름은 D-76 현상액을 물과 1:1로 희석해서 사용했다. 이 현상법은 긴 현상시간을 거쳐 여러 단계의 흑백톤을 얻는
데 효과적이다. 컬러필름은 C-41 현상을 한 뒤 밀착인화로 만든 후 사진을 골라낸다. 흑백필름은 현상 후 밀착인화를 한
후, 11x14inch 인화를 하는데 코닥 덱톨 현상액(KODAK Dektol)을 물과 1:2로 희석해서 사진을 인화한다. 인화지는
‘일포드 멀티그레이드 화이버 베이스 인화지(ILFORD Multigrade fiberbase paper)’를 사용했고 흑백인화는 ‘베셀라45
(Beseler 45MXT)’와 ‘로덴스톡 로다곤(Rodenstock Rodagon) 80mm 렌즈’를 이용하여 인화했다. 디지털이미지는 사진이
선택되면 어도비 로우(Adobe Raw)와 어도비 포토샵(Adobe Photoshop)을 이용해서 디지털 리터칭을 진행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들은 필름 사진과 디지털 사진이 뒤섞여 있다. 필름 사진들은 이마콘 스케너(Imacon flextight scanner)를
이용해서 필름 스캔 후 어도비 포토샵으로 처리했다.
감사의 말
Acknowledgements
저는 지난 25년간 머나먼 바다와 대륙을 건넌 400여 명의 한국인의 지난한 삶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습니다.
트랜스내셔널 한국인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초상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삶, 희망과
절망의 얼굴, 이제는 낯선 땅 묘지에 누워있는 얼굴, 죽음과 삶의 얼굴을 사진이란 매체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 얼굴에 담긴 굴곡은 어떤 지도로도 그려낼 수 없는 한국 디아스포라의 표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진은 멀리 떠난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서 돌아온 이들 혹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도 기록합니다. 저는
2021년에 《70년만의 귀향, 70 Year Homecoming》 이라는 제목으로 강제 징용을 다룬 다큐멘터리 사진을 온라인에서
전시했습니다. 저는 코로나 팬데믹과 환경 문제 등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글로벌 이슈에 대한 작은 해답으로 온라인
전시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2003년부터 2018년 사이 미국과 중앙아시아, 일본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촬영한 사진으로 전시 《잊혀진 사람들》을 구성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많은 분의 도움과 조언,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번 전시는 일우재단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상 다큐멘터리 부분의 수상 전시이기도 합니다. 올해의 작가로 선정해
주시고 전시를 지원해주신 일우재단 관계자분들과 심사 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3년에서 2006년, 뉴욕에서 좋은 가르침과 용기를 주신 故 임순만 선생님과 장혜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멀리
중앙아시아, 낯선 땅에서 힘든 삶을 헤치며 살아가는 고려인 동포 여러분, 故 한 야꼬브 선생님 감사합니다. 조선학교의
어린 학생들의 눈망울이 잊히지 않습니다. 사진을 보고 그때 그 시간을 떠 올릴 때마다 사진 속 재일 동포분들의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당신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아름다운 영혼이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제 자신과 우리 모두를 위해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깁니다. 전시 자문을 해주신 박수진 박사님, 비평글을 써 주신
김병학 관장님, 송기찬 교수님, 정가영 박사님께 고마운 마음을 보냅니다. 온라인 전시를 기획하고 개발해주신 Rebel9,
필름 스캔과 디지털 이미지 리터칭을 담당해준 칼라랩 임형주 실장님, 제 부모님 故 손문성님과 이길례님, 형제 승환과
미정, 아내 김윤선과 딸 지안에게 감사합니다.
미국의 비평가 수지 린필드는 ‘고통의 기록은 저항(resilience)의 기록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사진 작업은 잊힌
기억, 고통의 기억에 대한 다시 바라보기입니다. 〈삶의 역사〉 사진 작업을 하며 저는 제가 살아가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인간의 인고의 힘에 대해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역사와 망각된 기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성찰과 행동의 시작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사진 매체로써 역사 속에서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듣는 것은 지금보다 평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연대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구술자: 강명숙
저는 이제 순 그냥 서울사람이에요. 외국서 외국도 아니고 외가 시댁 근대 저는 구익동이라는데가 있어요, 저 대궐 앞에
근가 단성사 있는데서 그 뒤 골목으로 제 그렇게 있거든요. 거기서 이제 탄생했습니다. 이제 맨 처음에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다섯 살 때 유치원을 다녔어요. 그 때 그런데 이제 어느 날 아침에 이제 할머니가, 할머니가 두 분이 계셨어요.
그래 가지고선 할머니는 셋짼데 그 할머니가 암도 없어 다 돌아가고 글서 이제 우리 집에 계시는데 어느 날 아침에 같이
날 머리를 빗겨 가지고선 대리고 나가더라고, 단성사 앞으로. 그래서 이제는 나가봤더니 단성사가 그 때에는 굉장히
넓었어요. 거기가 근데 지금 보니까 아주 좁더라고요. 거기 사람들이 꽉 차 있어요. 모두 나와 가지고 그리고 그, 기
기마병인가 하여튼 말을 탄 순경이 왔다갔다 이제 그 또 하나도 아니고 한 둘인지 몇인지 왔다 갔다. 거기서 지키고
있더라고, 한참 있다가 저 쪽에서 소리가 “왔다!” 하는 소리가 나요. 그러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이 확 그냥 다 없어져
부렸어. 다 그냥 도망가고 이케 그 기마 순경만 저 왔다 갔다 하는데 그 마당에 신발이 쫙 깔렸어요. 다 급히
달아나가느라고 뱃겨졌지. 저 고무신이니 이런 게 ‘하 이게 뭔가?’하고 있다가 집으로 그냥 들어가버렸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 시절엔. 그 다음에 큰 다음에 이제 들으니까. 그게, 고종이... 으 그건 저 역사를 안 배워서 몰라요.
난 지금. 한 번도 역사를, 순종이란가? 하여튼 임금님 돌아가셔서 장례 나가는 날이 있었대요, 그거를 보러들 나왔던
모양이에요. 그래,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또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유치원 다닐 때 그 친구가 거기에
지금 인사동인가? 거기에 저, 지금 요리 집이 큰 집이 있어요. 저 오진암이라고...그 집 딸이 이제 나하고 같이
유치원을 다녔어요. 근대 이제 걔가 “우리 집에 가자” 해서 따라갔거든, 그랬더니 그냥 뭐 대문이 서슬 대문이 있지.
들어갔더니 그 안에 큰 마당 있고 저쪽에 또 문 있고 이쪽에 문 있고, 이쪽은 사랑채, 이쪽은 그냥 안채, 그런데 대문
들어감서 보면 이쪽으론 쭉 행랑방이 있어요. 행랑방이 그 조그만 방 하나씩에 툇마루가 있고 그기 저 종놈들 사는
집이야, 방이야 그렇게 해서 사랑채문 열어보니까 거기는 이제, 할아버지. 아버진지 하여튼, 하여튼 그분, 안, 안에
들어갔더니 이제 제가 이제 저희 방으로 데려가 그 때 벌써 걔는 방이 따로 있어. 그런대 이제 고 요만한 기집애가
마루를 닦더라고, 그래서 있는데 걔가 이제 상을 가지고 들어와. 찻, 찻상을. 지금 생각하는데 아마 코코아일 거에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비스켓 있죠? 저기 ‘모리나가 나베’ 동그란 거 지금도 그 과자가 있어.
모리나가 비스켓. 그 비스켓 그걸 인제 그 찻잔 옆에다 이렇게 몇 개 놓고 그런 것 처음 봤지. 나도 그랬더니 그 친구가
“너 이거 어떻게 먹는 거 아니?”, “몰라!” 이랬더니, 그걸 집어서는 찻잔에다가 찍어 가지고 먹더라고. 이제 그런 게
기억에 남아요. ‘얜 별거 다 먹네’ 이랬거든, 모르니까는. 그래 가지고는 학교 들어갔죠. 이제 국민 학교, 그
교동국민학교에 지끔도 있어요.
근데 거기선 제 저걸 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별로 모 다른 건 없었어. 거기엔 또 대궐 앞에 교동국민학교 뒤에 또 큰
양반집이 있었어요. 그 집 딸이 이제 나하고 급우 반, 한 반이야. 이제 또 걔네 집에 또 따라 가봤더니 거기도 그렇게
생겼어요. 그렇게 집이 넓어 그리고 이 집하고 똑같애. 그런데 안채를 착 하고 들어가니까 그 어머니하고 그 이제 그
하인들이겠지, 누에를 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누에 실을 뽑드라고, 그래서 거시거 누에가 그 저기 요만한
종이에다가 이렇게 놨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알을 까, 거기다가 어 알을 몇 개를 까 놓더라고. 그런 걸 본
일이 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학교를 이제 여학교에 들어갔죠. 근데 이제 저거한 얘기지만, 경기를 쳤는데,
떨어졌어요. 결국에는 그때는 두 번 발표를 해. 맨 처음에는 학과시험만 봐서 발표하고 그 다음에 이제 신체검사하고
면접하고 하는 건데, 1차에 가서 떨어졌어. 그 때 18명이 갔는데, 교동학교가 그 땐 학교를 많이 갔어요. 18명이
가가지고 그 전에는 18명이 다 붙었는데 우리 때에 가서는 18명이 갔는데 4명이 떨어지고 14명이 남았거든. 그래서 나는
되겄다 하고 있었는데, 또 떨어져 그 다음에 떨어졌어. 그래 가지고 신체검사나 하는데 체중 재는 거 있잖아요. 거기
올라섰다 내려서니까 이렇게 보더니 “한 번 더 올라가봐” 또 올라갔더니 체중에서 떨어진 것 같애요. 너무 가벼워서.
그래 가지고 이화를 아버지가 넣어줬는데 학교서 안 써줘요. 이화 나쁘다고 유관순이가 나왔잖아요, 안 뽑아줘요.
입학원서를 안 써줘. 그러면서 더 재수해라 그러는 거예요. 다시 해라. 근데 아부지가 안 된다고 너 거기 가라고 그래서
이제, 그런데 이제, 경기 마감하는 날 이화도 발표하는 날, 이화도 이화는 마감을 해버려요. 그러니 못 넣지. 거기 이제
마감이 됐으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아버지가 처 밀어가지고 그냥 학교 가서 막 써달라고 해서 써서 들어갔어요. 이화는
이제 들어갔어. 시험을 치려고 들어갔는데, 내가 지금도 그 번호를 안 잊어버려. 167번이더라고. 시험 치려 들어갔는데
교실에 몇 명밖에 없어. 내가 제일 꼴찌야. 입학 낸 게. 근데 시험문제 보니까 너무 쉬워 그냥. 그래서 막 이건 문젠가?
이러고서는 말았죠. 근데 이제 그날 또 신체 검산데 또 떨어진 거, 저기 또 다시 올라가봐 또 올라갔다 내려왔더니,
“아이, 집에 가서 엄마 젖 더 먹고 와 이러는 거야”, 아구 그래서 이거 또 틀렸구나 했어. 그랬더니 이게 됐어요,
난중에 들으니 됐어요. 그래서 인제 이화를 다녔죠. 그런데 거가 유관순이가 나오고 그랬기 때문에 저기 아, 그리고
인제 입학 들어가서 이름을 부르는데, 근데 여기서는 6년 내내 일본이름을 불렀잖아, ‘교메시코’하면 ‘하이’
이랬거든요. 근데 여기서는 전부 ‘강명숙’이러는 거에요. 그게 얼른 안 와, ‘강명숙’ 그러면 ‘하이’ 그러면 또 불러
‘하이’ 계~속 매(며)칠을 가도 그냥 여전히 강명숙하면 어이구 그게 안 떨어지더라구요. 그냥 ‘하이’ 그러면 ‘네’ 할
때까지 매칠을 해서 난중 나중에 내가 됐죠. 근대 이제 그 때 당시 총독부에서 가끔 나와요, 기숙사 이제 애들이
있잖아요. 기숙사에 가서 돌아다녔는데 시간표를 이제 붙여 놓잖아요. 그러믄 그 일어를 갔다가 거긴 거기서 인제 일본
놈들은 국어라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화는 그게 아니지 일어야, 시간표에다. 일어, 영어, 조선어. 시간표.
이제 돌아다니면 왜 일어냐 그거야. 국어가 아니고. 그래 가지고 걔들 며 칠 뒤 오면 ‘얘들 정학시켜’. 그럼 이제 가
갔단 말이에요, 그럼 여선 정학시켜요. 그리고 그냥 학교 나와. 그렇게 했어요. 이화가 그니까 철저했지 정신이.
그렇게 해가지고서는 이제 저걸 하는데 내가 그 때, 피아노를 했어요. 그래서 이제 피아노를 해서 이제, 이제 입학 그
저기 곡들이 반주 요청을 했는데 그 때... 선생님이 함경도 선생님인데 졸업 맡은 얘들 한테 얘기를 해주기를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선생님이 저기 음악이나 미술 같은걸 소질이 있어야 된다. 일류가 되려면은, 그런데 열심히 하는
걸로는 안 돼. 그러니까 그런 건 생각해서 해라, 그 그 소릴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나는 원리가
이 힘이 없어 기운이 없어, 음을 제대로 못 내는 거예요. 그니까 아 그러면 나 안되겄다. 음악 하면 안 되겄다. 그러면
어떡하나 하는데 근데 어려서부터 ‘너 커서 모 되니?’그러면 ‘선생님 되니?’ ‘아니요 나 의사 되요’ 그 쪼그말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어. 그러는데 난중에 지금 생각하니까 안 되겄어.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문광고가 났어.
신문을 쭉 보니까 일본에서 나 나온 그 약학학교가 시험 치는 날이 나왔더라고. 그래서 거기다 입학 원서를 냈어요.
그랬더니 어떡허나 이렇게 하고 있었더니, 발표가 났는데 합격이 됐어. 시험도 안치고. 그래서 내 아버지한테 말도 안
꺼냈죠. 그래가지고 이렇게 합격된 걸 갔다 이제 아버지 앞에 내놓고 나 이렇게 됐으니까 보내주세요. 안 된다고 그때
당시 기집애라고 그러잖아요, 기집애가 어~딜 그냥 그런 데를 가느냐고 막 그냥 안 된대요. 그래가지고 외할아버지도
할아버지한테 가서 할아버지도 난리를 치고 그래서 난중엔 내가 거 밥을 조금 먹었어. 밥을 얼마 안 먹었거든. 단식을
했어. 보내달라고 막 떼를 썼죠. 그랬더니 가라고. 그래서 이제 동경에를 갔어요. 갔는데 이제 그 때 이제 육십명
있는데 한국 사람이 열 네명 이에요. 그런데 그 중에 함경도 사람이 그렇게 많어요. 함경도. 그런데 이제 그 유학 온
사람 경기도서 온 사람은 없어. 전부 미션 스쿨이야. 그 열 네사람이. 배, 배화, 원산, 영생…(손가락으로 수를
헤아리며) 이제 다 잊어 부렸네. 함흥의 영생이던가 다들 미션스쿨이야. 그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이제 하는데 입학을
했다면 그 한국 사람이 그러니까 한 40명쯤 됐어요. 그래 가지고서는 이제 모여 이제 입학 환영한다고 이제 어디
나가서. 가면 순경 두 사람이 꼭 지키고 있어. 우리 모이는 걸. 그럼 우리가 수다 떨고 그러구 있다가는 점심 되잖아요?
점심 먹고 그러면 가 뻐려. 그냥 다시 안 와요. 근데 끝 난 다음에 해질 때 그 때 이제 동해물과를 배웠어요.
아버지 호가 유하예요. 있을 유자에다가 하자 무슨 하잔가 나 한문도 제대로... 요렇게 쓰고 안에 여름 하자 쓰는 거
아세요? 한문 아세요? 이렇게 이렇게 하고 안쪽에 여름하자 있을 유자에. 유하 학원이예요. 재단법인 유하 학원. 그렇게
해서 이제 그 그게 이제 저기 뭐냐, 철원에 땅이 있었어요. 많이 있었는데 거기서 일부, 3천석을 연다 그러는데, 그 때
당시에 3천 석이야. 그게 그걸 냈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이제 이화가 이제 완전 독립을 한 거죠. 그렇게 해서 됐는데
아버지가 얼마 못 사시고 돌아가셨어. 그런데 이제 있는데 또 삼팔선이 생겼잖아요. 그래서 그게 그 전에는 그게
들어갔어요. 똑바로 줄 그었기 때문에 철원 땅이 이북으로 넘어갔다고.
시집가라 그러면 막 싫다고 했어요. 난 시집 안 간다고 그러고 있는데 강제로 이제 정했어요.. 강제로. 이제 강제로
이제 해가지고 신랑 얼굴도 모르는데 보고 난 담에 열흘만에 혼인 날짜를 정한다고 그러는데 뭐 정해도 뭐, 생일날 안
되고, 어머니 아버지 결혼식 날 안 되고 모저 다 빼니까 날이 안 나온대. 내년이나 되야 된대. 그래요 그래서 부랴 부랴
한 게 열흘 만에 결혼을 했대니까. 그러니까 얼굴도 모르고 한 식이야 그래 가지고 서는 저거 했는데 애기도 얼른 안
들어서더라고. 조그마니까. 조그매 가지고 그렇게 해서
이제 저기... 해방이 되가지고서는 그 동안 6.25가 났잖아요. 6.25가 나가지고서는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갔죠. 그래서는
이러궁 저러궁 지내다가 돌아와 가지고서는 그냥 그 다음에 아무것도 못 한 거야. 애들도 기르느라고. 아이를 딸 하나에
아들 셋을 봤어요. 근데 인제 저 걔들 그니까 거기까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집에서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논두렁 일도 막일도 안 해봤어요. 전혀 모르고 부엌일은 남이 하는 건지만. 내가 하는 건 줄은 몰랐어요. 그래 가지고
오십 넘어서가지고 이제 그때 한참 사람 집구하기 어려우니까 그때부터 부엌에 들어가서 하니까 너무 서투르죠. 그냥
(하하하) 지금도 음식 같은 거 하면 맛있다고 그러는데 할 줄을 몰라. 어떻게 하는지. 지금까지 살아도 별로 난, 저기
없어요. 뭐 뭐 뭘 했어야지 얘깃거리가 있지. 거기까지 밖에 난 얘깃거리가 없네. 시간도 모 얼마 안 걸렸죠?
인제 할아버지 저건데. 다 늦게 이제 늙어가지고 할아버지가 왜 저러나 그걸 알았어요. 부모 없이 컸기 땜에
저러는구나. 적극성이 없어. 가는. 그걸 몰랐거든요. 산을 참 좋아했어요. 매~주 북한산을 올라갔거든. 나는 이제
앞서가요. 도리어. 이 냥반은 뒤에서 쫓아와. 그럼 그 길 밖에 모르고 딴 데 갈 생각을 안 해. 나는 딴 데도 가보고
싶거든. 안 가. 모르니까. 안 간대. 그럼 내가 앞서가면 난중에 쫓아오지 글로 가면 나중에 쫓아오죠. 가면 글로
가더라고. 그런 성질이 있었어요. 몰랐어요. 나는 뭐든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저거 했는데, 이 냥반은 그게 아니지.
나중에 인제 늙어가지고 죽을 무렵에 밥 먹을 때마다 어려서 당한 얘기를 하더라고. 왜 지금 와서 그러느냐고 다 지나간
일인데 왜 그러냐고. 밥을 먹어도 반찬을 이렇게 먹으면은 김치 놓고 딴 반찬 놓고, 한 바퀴 삥 다 쑤시고 돌아서
결국엔 김치 먹어. 국하고 찌개하고 있으면은 간도 안 보고 그때는 간장은 의레 그거 먼쳐 넣는거야. 그거 넣으면 짜지.
그러면 숭늉 가져와. 갖다 주면 붓지, 이렇게 하면 싱겁지 또 넣지. 또 이렇게 하면 불만이니까 막~ 이렇게 하니까 물이
넘쳐서 흐르잖아. 그게 얼마나 난 싫어. 왜 그러느냐고. 막 친정에 하고 같이 살았거든. 그니까 아버지가 넌 왜 성만
나면 왜 이렇게 쫑알쫑알 하니. 왜 저러나, 하두 저걸 해서 나중엔 안 그랬지만도 젊었을 때 그렇게 한 거예요. 왜
그러나 했더니 어리굴젓을 잘 먹었대요. 그걸 사다 놓는 시동생이 있었거든. 걔가 먼저 젓가락이 가면 시어머니가 탁
친데, 그리고 집어서 그 앞에다 딱 갔다 놨대. 그니까 못 먹는 거야. 먹고 싶은 걸. 그러니까 밥상 받으면 심통이 나서
다 쑤셔놓고 그걸 나중에 알았지. 늙어서 그 얘길 하니까. 그래서 내가 애들 결혼하면 부모 있는 사람이랑 해라 그거야.
구술자: 신복옥
내가 41년도에 태어났는데 우리 엄마 아부지가 중국 와서 결혼했다는데 나는 내 국적이 울진읍에 있는지 내가 의문표야.
우리 할어버지가 댕김서 국적에 올렸~는지 이것도 몰르고...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 다~
돌아가셨으니까 하여튼 국적이 있는 건 맞는데, 지금 내가 아직 머릿속에 물음표가 있어. 내가 솔직히 하는 말인데 우리
어머니하고 우리 아버지는 만주에 와가지고 화전, 팔도허자라는 데서 살았대요. 팔도허자. 거그 아주 그런 산골에서
살았는데... 우리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일찌근이 돌아가셨대요. 5남매를 두고. 우리 고모 서이, 큰 아버지, 아버지
그리 두고서. 근데 옛날에는 지끔은 갤(결)형제 그리 맺는데, 옛날엔 갤형제 맺었으믄 7형제 삼아 지내가지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간 다음에 갤형제 할아버지가 이 오남매 다 거뒀어(둥그렇게 한 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거둬가지고 시집 장개 보내고, 우리 할아버지는 장개도 안가고 평상 혼자 이 5남매를 거느려가지고 시집, 장개
보냈는데, 우리 큰 아버지한테 계시다가 큰 아버지가 뇌출혈로, 옛날에는 급설병이라 그러잖아요? 지금 말하면 뇌출혈로
돌아가셨어. 가신 다음에 우리아버지가 소발구로 가서 우리 할아버지 모셔왔어. 우리 아버지를, 어머니가 모셨어. 우리
할아버지를. 우리 여기서 한국에서 갈 찍에 6촌 형님 둘하고 우리 아버지, 큰 아버지 친형제가 같이 만주에 들어갔는데
각각 히어(헤어)졌다가 우리... 아버지 6촌 형님이 외로우니까 만주 가서. 외로우니까, 우리 아버지를 거기로 불른거지.
이사 거기서 시켰다가~ 우리 큰 아버지 돌아가시고 우리 할아버지도 글로 넘어 모시간데, 어디나면~ 시발씅이라는데
진가포천에. 거기서 살았어. 그 고모네는 딸들 다 시집 보냈으니깐. 그래 살다가 자식을 낳는데 8남매를 낳았어.
8남매인데 내가 맏이야. 그래 가정이 곤란하다 보니까, 큰집에 애가 작으니까 나를 큰 집으로 보내서 기숙 살어, 쌀만,
아무것도 아니고 쌀만 몇 백근 되는 밥 먹을 쌀만 먹고 거기서 있다가, 우리 동네 큰~ 불이 너무 나가지고(두 손으로 큰
원을 그리시며) 동네가 다 떠내려 가다시피해서 쌀도 공급도 몬해서 내가 학교도 못 다녔어(하하). 못 다니다가 와
가지고 애를 좀 보다가 하도 학교 가갔다고 환장을 뛰니까 우리 아버지가 쭝국학교를 보내가지고 쭝국학교에 이제
조선학교 4학년 댕기다가 중국학교는 산수는 거저먹는 누워서 떡먹기 인데(하하) 어머니한테, 과외선생에게 시간을
가리켜 가지고 1학년에서 3학년 올래 뛰 가지고 공부를 그래, 중국 소학교를 필엽했어.
우리 그 마을에 조선집이 열 다섯호 살았어, 조선사람이. 근데 너무 적잖아~, 학교도 없고. 그리 가지고 하우~ 쭝국
동네 사니까 만~날 옥수수밥이야 수수밥 아니면 옥수수밥이야. 그렇게 먹으니까 조선 동네서 좀 잘 사는 집이 왔으니까
우리 아버지 딴에는 사우(사위)라도 좀 잘 사는 거 옆에 두면 의지가 되나 싶은지 중학교 시험 처논 나를 이제
결혼시켰어. 결혼시킬 때 신랑이 존거(좋은거) 아니라 내 생각에도 그 집이 잘 산다니까 쌀밥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싶어서 그 마음으로 반대는 안 하고 결혼했지~. 동짓달에 만나서 2월 스물 나흣날 결혼했어. 2월 스물 나흣날
결혼했는데 시집살이가 너~무 되고, 시동생 내랑 동갑짜리지, 시어머니 시아버지 있지, 엄마 없는 조카딸 있지, 그니
우리 엄마가 생각에 우리 딸이 저래 부담이 너무 시(세)니까 시숙 혼차(혼자) 있는 거 어디 중신이라도 해주믄 딸한테
부담 안될까 싶어서, 사람을 내어서 우리 시숙 장개를 보냈어. 장개 보내고 내가 시부모 3년 모시다가 우리 시부모
시집살이가 너~무 되서 시어머니가 ‘아(아기)’ 선 줄 몰르고, 그 전에, 3년 전에. 우리 시어머니가 머라고 하냐면 ‘안
되갔다. 저년이 우리 지둥 뿌리 뽑아 먹고야 숨쉬지 저렇게 삐짝 말라 형편도 없는 거. 우리 집에 험한 꼴 보이지 말고
빨리 이혼해라’ 하더라고 그러니까 우리 신랑이 글지 뭐. ‘아니 여기 다 신씨네 동넨데 여와서 우리가 혼자 이사 와서
이혼하면 챙피시러우니까 내가 석 달 만 데꼬 살고 이혼하고 돌아가자’ 그래서 우리는 비게 두 개, 이불 한 채, 요대기
하나, 요만한 농 하나 가지고 살림 나는데, 그 때 살림 날 때는, 뭐이냐면 좋은 점이 식당하에서 중국에서. 식당에서
밥을 풀떼 죽이라도 주니까~ 그러면 들고 가면 다 먹을 수가 있다고. 생선대 이런 데.
그래가지고 우리가 그 3월 스무 날, 2월… 초 이튿날 살림을 났는데, 3월 스무날로 우리큰아를 났어. 그래도 몸 테가
안났던가봐, 우리 시어른들이 몰르는 걸 보니까. 그래 살림 났는데 며칠 안 됐는데, 우리 옆집사람이 그래 거 시어머니
와 있다고 그래. 우리 시어머니가 꼴두새벽에 와있는데 ‘안녕하세요’ 하고‘너희 시숙 네는 쌀밥 준다 그래 이사 가고,
내 우리 손녀딸만 업고 왔다’ 그래. 그 좋은 집 다~ 팔아먹고 살림 다~ 가지고 우리 떠나고 시어머니하고 조카 딸하고
우리 집에 보냈지. 보내서 할 수 있나? 난 뒷방살이해도 너이서 살았지. 살다가서는 그 담에 우리 시숙이 몬~ 사니까 또
10년 있었다가 도로 이사를 왔더라고. 그리 또 우리 신랑이 나가서 방을 하나 잡아주었지. 잡아주다가 한 세 번 이사,
우리가 받았다 들있다 그 집세 우리가 다 부담했지. 그럴 땐 신랑도 쫌 밉더라고~. 그 때 이혼하라고 나를 글쎄, 그건
저네 형제라고 집세를 뒤봐주고 가면 또 뒤봐주고, 그래도 그 때 여자들은 한 번 남자한테 싫다는 말도 한 번도 몬
해봤어(손가락을 흔들며) 속~으로만 육지배판이 있어도 말 몬하고 꾹 참고 살았지. 그래서는 이제 ‘아(아기)’ 다섯을
놓고 살고, 살림도 살살 이루고 신랑이 또 학벌이 좋~아가지고 인물도 좋고. 나는 그거 대면 아무것도 아닌 신랑이
내한테 그리 잘해주니 그 때 나 어린 생각에도 그랬어. ‘저 사람이 나를 그리 해주는 데 나는 저 사람 뒷받침을 어예
잘하나?’ 그 신랑이 머리가 쓰긴 쓰는가봐. 열 다섯호에서 다~ 이사갔어. 밥주는 데로. 근데 우리 신랑은 대대회계인인
우리 장부를 맡겨야 가잖아. 그럼 장부 안 맽겨(맡기고)가면 다모자로 되잖아. 그래가지고서는 우리 신랑이 거기서
머리써서 조선사람을 계~속 받아들여서 인제 한 해 이 때 되니까 우리 거기도 쌀밥 먹고 좋고 하니까, 조선사람을
받아들여가지고 구십야들(구십여덟98)호를 받아들였어. 본래 열 다섯집 있어 다~ 간 사람까지 다~ 받아들여가지고
조선학교 꾸리고, 생산대가 두~개 생산대가 됐어. 그니 살기도 엄청 좋더라고, 그래 동네가 잘 지어졌으니까. 그래
사는데도 힘든 일이 많았어.
그 넘의 뒷방 살이하다가 넘의 집을 하나 살라 그니까 여름에 배락(벼락)맞아 죽은 사람있잖아. 그런 집은 누가
끔쩍하다고 누군들 잘 안 산다고. 그래 우린 돈이 없으니까 싼 거 그 집이니까, 중국 돈으로 300원에 그 집을 샀어.
사가지고 살다 가서는 집이, 동네 샘이 하나인데 샘이 얼~마나 먼지 우리 신랑이 일하러 가기 전에 물을 딱 한 짐 져다
줘 바빠서. 나무 통으로 이래 지가지고(통을 지면서 가는 모습을 흉내내며) 한 짐 가지고 뭐하겄어? 아이들 있지,
빨래하고, 뭐 걸레라고 빨라면 물이 모자래. 신랑 없는 짬에, 우리 그 집은 요기는 창문이야, 앞에 터 밭도 있고
그런데, 놈이 집을 지어가지고 원 틀만 있지 문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샘 옆이라. 그래 내가 웃전을 쳐주고, 내 집을
팔고 그걸 계약했어. 그래 가가지고서는 그~ 사람들한테 공사 사람들한테 얘기해가지고 나무를 몰래 찍어다가, 밤에는~
나무를 방에다 갖다 말려 놓고, 낮에는 누가 볼까봐 장팡에 갖다 놓고, 그걸 계속 말려가지고 그 집을 인제 문을 짜서
다~ 달았어. 다 달고 나니까 또 생활이 나날이 발전되고 아이들도 공부 가리킬라고 하니까, 우리 혼자 초가집을 짓게
됐어. 초가집을 짓는데 그 때 나는 몰랐어, 철이 없어서. 내가 너~무 신체가 약하다고 그 동네 할머니가 산골에 이사를
갔는데 와보더니, ‘니가 이렇게 말라 어예 살갔나, 애들 델부고.’ 삼을 시뿌리 갖다 줬어. 근데 지끔 여기 말함
삼닭이야. 근데 해 먹을 줄 몰라, 철이 없어가 삼대가리도 안 띠고, 닭에다 여가지고 꼬아놨더니. 근데 내 닭인데
장작불을 대놓고 꼬아놨는데 신랑이 회하고 와서 솥, 냄새가 나잖아~. ‘뭐이나?’ 그래 그거라니 ‘어따~ 이거 나줄라고
했구나’ 그먼(그러면서), 다~ 뜯어 잡순 거여. 그 뜯어먹고 잡숫고 나서는 그 이튿날 또 비가 칠~칠오니까 우리
생산대에서 돼지 한 240근 되는 거 여기 말로 하면 육십키로 넘는 걸 잡았어. 잡아가지고 우리 신랑이 그때
청년시절이니까 술 먹고 막 꼬치장에다 뭘 찍어먹고 춤추고 놀고 오더니, 집은 지을라고 막을 세와놨는데, 3월달인가?
4월달인가? 막 신랑이 피를 토하는 거여. 뭐 어디가 앉으면 피가 콸콸 토하고 그러니까 막 동네 아줌마들이 와서
‘아이고~ 안 되겠다. 저 집 지은 놈 다 팔아가지고 빨리 너 신랑 빙(병)고쳐, 이거 아~이들 데리고 니 신랑 죽으믄 어예
갈라나?’ 그러더라고. 그래도 나는 또 답답한데 신랑 피를 토하면서 이럼서, 그 땐 휴지도 없었어. 곤란해서. 신문지~
이래 가지고(신문지에 피를 뱉는 것처럼) 피를 토하며 뭐라 그냐면, ‘내가 죽어도 아이가 서이 너이 되는데~ 집이
있어야 된다. 집 지어놓은 것 절~대 팔지 말라’ 글더라고. 그래 가지고 동네사람 말하니까, 그 병원에 가보라 그래.
군대 병원에 간다고. 우리가 길림 가는 역전에 신랑을 델꼬 갔어.
이렇게 시 허연 털 노인이 우리 신랑 피 토하는 거 보더니, ‘왜 그는가?’ 그래 그 사실 얘기하니까, 병원에 가야
쓸데없다 그래. 난 그 때 우리 신랑 죽는 줄 알았어. 그랬더니 여기 말하면 해당화뿌리 같다. 해당화 뿌리를 파서~ 때려
맥이래. 그저 물먹듯이 그냥 먹으면 된대. 와 그러냐면 우리 신랑이 지금 회(폐)에 가래 가시라한 실~
모래혈관(모세혈관)이 터졌대. 모래혈관이 터져서 그러니까 이걸 해먹는데. 그거 캘 쯕(캘 적)에 많이 캐라 그래. 와
그냐면, 어느 때 이 사람이 또 도진다고 하는 거야. 그래 내가 캐서 장팡에다 이렇게 말려놓았더니, 정말 3년만에 또
도지더라고. 그 병이. 그래 도지 가지고 그 뿌리를 또 끓여 먹였더니 그 다음부터는 영~ 나아지더라고. 그래가 동네
도움으로 청년들이 낮에 생산대에 가 일하고, 저낙(저녁)엔 백척짜리 오백척짜리 전기, 다마를 걸어놓고 집을 지어줬어.
동네서 다~.
청년들이 이래 모여가지고 쭝국사람, 조선사람 볏집으로 흙을 뚤뚤 말아가지고 하는 집을 그래도 두 간 초가집을 잘
지어줬어. 그래가지고 그래 살다가서는, 우리 신랑하고 내하고 인제는 애가 인제는 거의 다섯째 들어 앉은 거야. 우리
찌끄만한 딸이. 근데 또 공사에서 머이냐면, 이제 이 아저씨는 알 거야. 집이 여기 한국처럼 여기 저기 안 있고, 동네
번~듯하고 살기 좋은데 집을 거기다 다~ 몰 미쳐. 집을. 인간 숫자대로 터를 주는 거야~. 그래 그때는 우리 하마, 아들
며느리고 아홉 식구 면적을 집 짓는데 딱~ 하니까 집이 엄~청 좋더라고 터가. 샘도 우리가 주방에다 파놓고 잘~
해놓으니까 살기가 참~ 좋더라고. 그래서 살기 좋아가지고 집을 지을라니 양식이 없어가지고 지끔 한국에 와 들으니
그게 식중독이야. 양식이 모자래 밥을 쪼금해서 일 하다 보니까 찬밥 남은 걸 내가 세 번 찬물에다 헹구어 먹었어.
아이고~ 집 짓다가 둘째 딸 하고 내하고 다 쓰러져 죽었던 게 그 때. 지금 우리 둘째 딸도 그 소리하면 눈물이
글썽글썽해.
그래 곤란하게 살고 정말 거시기 하다가 그, 한국에, 우리 시숙이 방송으로 우리 찾았다는 것도 몬 찾았지 난. 그 때
문화대혁명 후기라 누가 한국하고 연락하먼 다시 문화대혁명 오면 죽는다 그래서, 연락 몬 하고 있다 집 짓는데 빚이
조금 있었어 그 때. 빚이 좀 있는데 이 빚을 갚을라니까 너무 힘들어. 우리 땅에서 나온 쌀은 내가 집 짓느라 돈 꾼 거
있잖아. 그 이자 쌀 주게 되면 양식도 모자래는거야. 계~속 3년을 그렇게 뒤볶으니까 사람이 정신이 왱~한게 하니라
기와집 잘 지어도 그 기와집도 귀찮더라고 마지막에는. 그 빚에 시달려서. 그래 가지고 내가 한번 우리 식구. 저 사돈
있는 데 갔더니, 식구 땅이 한 두 어쌍지기 있다 그래서 그걸 맡으라 그래. 그걸 한해 맡았나? 잇해 맡았나? 빚을 싹~
가렸어 그 때. 그래 빚을 그래 다 가리고서는, 우리 옆집에서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내가 귓담해 가지고 계속 우리 시숙
네 하고 연락 안 끊고 맨~날했더니 초청이 되더라고. 초청 되서 그 때 왕복 비행기표 사줘 가지고 씨양강으로 그 때
왔던 거야. 홍콩이지. 여기 한국말로 하면 홍콩이지. 그 때는 우리 홍콩으로 돌아올 때 왔던 거야. 팔구년도(1989년).
하여튼 올림피크 그 첨에 하고 지나간 그 이듬해에 왔으니깐. 그래 왔는데 그 때 와가지고는 시숙이 챙피 시럽다고 일을
몬 하게 하더라고. 그 때 우리 아주버님, 진우야. 내가 니 동네 전주 최씨네가 지금도 일신리에 열 아홉 집이 뭉쳐
살아요.. 일신리. 오청읍 일신리에.
거기가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읍 일신리에 있는데, 열 아홉 집이 모여 사는데. 내가 니 이래 초청해가 나가 일하면
동네에서 욕한다. 몬 하게 해가지고, 석 달을 있다가 돌아올라 그니까 내가 어찌녁에도 말했지만 그 국회 김영삼이 참가
대통령 될 적에 국회의원으로 있던 최병찬씨가 가만 보니까 중국에 암~만 잘 산다 그래도 우리캉 곤란하단 소리를 지는
다 들었거든. 그니까 한 날 저녁에 친척들을 다~ 모~아 놓고 십시일반을 대부 가는데 차비 보태주라고, 회를 해가지고
회관에서. 그래 돈을 좀 보태줬어. 그 보태주는 돈이 정~말 그 빚을 가릴라니 엄청 힘들더라고. 왜힘드냐면, 그럴 때
우리 넝감(영감)이 나올 찍에 중국 돈 5천원 꾸먼, 중국에 그 때 30년 전, 큰~ 돈이야 지금 하면 한 3천원. 한국
돈으로. 그런 엄청난 돈인데 우리 영감은 초청장이 와도 갈 엄두가 안 나는 거야. 그래 나는 중국 학교를 댕기고, 중국
동네 오래 살다 보니까 중국 동무들이 많아서, 친구들이 많아서, 내가 5푼 이자에 5천원을 꿨어. 내가. 중국 돈 5천원에
5푼 이자를 꿔가지고 이래 갖다 노니까 신랑이 뭐라 그냐면 5천원 이거 몬 갚으면 니나 나나 한군데서 죽어야 되니까~
우리 북경 가서 천안문에 가 유람하고 만리장성 구경 다~ 허고 죽드라도 우리 이래 죽자 그래서, 신랑 한국 나올 찍에
북경 와서 우리 둘이 일 주일 머물렀어. 일주일. 그래 구경하고 돌아다녔지. 근데 그 와 가지고 친척들이 보태준 돈이
둘째 아들 약혼할 때 딱 나왔거든? 그래 둘째아들 잔치하고 그 돈 5천원 갚고 나니까 아무~것도 안 남아. 그래 또 바뻐
나가지고 우리 시숙한테 편지를 썼더니, 그 담에 우리 시숙은 우리를 초청 안 할라 그래. 왜 그러냐면 이렇게 곤란한 줄
모르고 우리 제수씨가 편지를 쓰는데, 우리 중국에 얼마나 잘 살고, 우리는 뭐 어떻고 그랬어서 자기가 덕을 볼라고
초청을 했는데 까꾸로 보니까 거~지도 이런 상거지니까 다시 초청을 안 할라 그래요.
딱 손 띠더라고, 그러니까 요 최병찬씨가 그 한 동네 사니까 저 대부를 지 자가용에다 싣고, 수~습이며 뭐이며 지가
댕기며 대부요, 우리 전주 최씨네 나간 집이 딱 이 한 집인데 우리 여러 사람들이 이 한집을 못 도와주겠나 그러면서
그~냥 끌고 댕기면서 다시 초청해서 우리 둘이 나왔어. 그 때는. 우리 둘이 나왔는데, 일 년 석 달을 했어 일 년 석
달을 하고 났는데 청주 내덕동에 홍선네란 사장, 아니 식당에 내가 주방장으로 들어왔어. 한달 석 달하고 재미가 봐서
돈을 벌어 가지고 좋은데, 사람이 좋은 중에 불행이 있다고, 내내 좋은 건 아니라고. 우리 큰 아들이… 병에 걸렸어.
우리 현에 우체국에 오빠가 국장으로 있는데 그 때는 개인 집에 전화도 없었어. 그래 전화가 왔는데 뭐라 그냐면 너
아들이 죽게 됐는데 빨~리 들어오라 그랬어. 사흘 만에 수습 밟아 들으갔지. 이거 요던(돈) 번 거이 우리 아들 병
고치고, 그 다음에 또, 우리~ 그 기와집에 살다가, 한국 나와보니 눈이 사람이, 높아지잖아. 요 돈을 자식들 누구
주냐카면 우리 아파트를 하나 사자. 그래 내가 아파트를 시내서 하나 샀어. 그 돈 남는 걸로. 그렇게 하고는 우리 둘이
또 쏙~였어. 중국정부에는 쏙이기 좋으니까 신분증을 곤(고)쳤어. 65세로 곤쳤지. 그 때 내가 65세도 안 되었지.
오십서인가 그런 거 65세로 고쳐 가지고 나왔는데, 아~ 인천에 와 잡혔어 인천에 와 잡혔는데 나는 나왔어. 하머 우리
시숙하고 조카는 자가용 태와서 짐 싣고 이러는데, 우리 신랑이 얼마나 고지식한지, 아저씨 한 번 나왔던 거라 하면서
나도 고치고 그 게 있는가 봐 컴퓨터에. 그래서마 우리 영감이 우리 이웃집 아줌마 곰방 나왔는데 가시라고. 그럼 내
눈치 알아채고, 우리 아주버님 차를 탈 건데, 우리 넝감이 거기서 뭐라 그랬냐면 우리 마누라도 고쳐가지고 나왔다고.
아~ 그래 말해 노니까 그래 옆에 그 아가씨들이 얼마나 봐요. 나는 우리 영감 나오도록 기다리는데 꼼짝없이 여권을
뺏긴거야 글쎄. 뺏겨가지고 그날 저녁에 갇~혔지 거기. 갇혀가지고서는 내가 그 경찰한테 그랬지. 우리 아주버니가
말했지. 최병찬씨한테. 오다가 잡혀서 들어간다 그니까. 그 사람이 밤에 퇴근하~고 차를 몰고 인천까지 와서, 그 찾느라
얼마나 헤맸는지 그래도 찾아 들어왔더라고. 그런데 나는 영감이 너무 미워서 바보처럼 그런 소리했다고 처음에는 막
욱박지르고 지~랄하고 내 성질 낼 대로 다 냈지 뭐. 그 담에 우리 넝감이 막 얼굴이 뻘~건게 사람이 밥도 안 잡수고
죽을 지경이야. 가만 보니까 한국도 몬 가고 영감도 히로 모해. 그래 내가 또 마막으로 달갰네(달랬네). 빨리 잡숴
잡숴. 나는 그저 화장실 댕긴다고 어느 틈 아래도 보고 들고 튈라고, 내맀다 뛰 가지고 난 도망칠라고 막 그리 헤맸지.
그니 그 지키는 사람이 뭐라그냐, ‘아줌마 너무 설치지 말아요~. 어데 들고 뛰다가 떨어지면 다리 뿌러지는 사람
있다고. 허리 다친 사람도 있으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아니 요것들이 어예 요렇게 알아.
그래 저녁상 먹고 치고 한 11시 넘으니 최병찬씨가 왔는데 뭐 먹을 꺼, 봉투에다 돈 10만원, 그래가지고서는 배타고
도로 갔지. 배타고 도로 갔다가 다시 우리 본 신분증으로 최병찬씨가 그거 보니 너무 마음이 안 됐는거야~. 얼마나
나오고프먼, 나를 쏙이고 나올라 그랬냐고. 우리 아주버니가 또 졸랐어. 졸르니까 할~ 수 없어 그랬더니 초청 우리 둘이
해줬어. 둘이 해줬는데~ 오월 스무나흣날 나왔는데 음력, 양력 오월 스무나흣날에 나왔는데 음력… 12월 8일날 우리
넝감이 죽~은 거야. 그 때, 음… 오성에서 고속전철이 생겼어. 오성. 그래서 일하다가 겨울에 모시 싣고, 자루 벌려주고
거 허란 일 했는데, 새참을 라면을 내가 끓였는데, 함박식당에 도우고, 노가대 일하는데 요런거 토맥이 같은 이래
맞추고 한달 월급을 90만원이던가? 70만원 고래 벌고 있는데, 3시 됐는데 이과장이 라면 잡순 그릇을 설거지를 우물에서
하는데 이과장이 막 손질을 하더라고. 그러고 와 그러시나 날 불르더니 그냥 이러더라고. 그래 나는 쫓아갔지. 아저씨
병이 과하다 그래. 한 번 보니까 사람이 다 됐어요. 와 그냐면 하마 바지에 오줌 싼 거보니 사람이 다 됐더라고. 그 때.
그래도 너무 안타까워서 일국구(119)를 불러가지고 청주 병원에, 우리 손자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손자가 지는 이런 머리
하는 건 병원이라도 같은 병원이라도 이런 건 몬 한다고 해서 친구병원에 소개해서 갔지. 가서 거기서 그 의사가 잘 안
된다 그랬는데도 제~발 살려달라고 숨만 붙여달라고, 내 중국까지 자식들한테 끌고 갈 정도 되도록 살려달라고 너무
애걸하니까 그 사람이 할 수 없어서, 그럼 1% 희망을 가지고 해보는 게 8시간을 수술을 했어. 수술해가지고 중환자실에
대기하는데, 2시만 넘으면 괜찮고 2시 전에 전화가 오면 내가 깜짝깜짝 놀랬는데 머리를 홀딱 깎고 수술을 했는데
여드레 만인가 머리가 약간 요렇게 까무리 하더라고. 그래가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나온 지 몇 개월 안 됐는데 돈 번
것도 없지. 그래도 와서 우리 둘이 딴에는 열~심히 번다고 돈 버는 족족 아이들 난방비야 뭐야 다 주지 돈 한 푼도 없지
뭐.
그래 수술비가 그렇게 천 만원 나오니까 돈 할 수가 없었다고. 그래가지고 그래도 오성아저씨 네가 우리 같이 일하는
한국아저씨들이 아주 마음이 고~마워. 그 때 돈을 얼마 해야 수술을 드가잖아요. 그 버는 사람들이 다~ 백만원,
오십만원, 정 없는 사람 삼십만원, 오백만원을 맹글어가지고 그래도 수술실에 들어가서 이 사람들이 싸인을 해가지고.
그래 수술하고 나서 야드레만에 돌아가셨지만도, 한 가지 지금 안즉까지 내 안타까워 찾을 사람이 누구냐하면
유재훈씨라고. 그 이사장 밑에 기사질 했는데, 이 사람이 청주에 살다가 어디로 이사 갔는지 처음에는 연락이 됐는데
핸드폰 고치고 지금은 연락이 안 된대. 우리 자식들도 이리 나오고 했는데, 이 사람한테 아무 때고 감사 말을 한마디
할래도 찾을 수~가 없어. 유재훈이라고. 그 사람이, 우리 넝감 아픈 날로 지 차로 내 싣고 가지, 저 색시 금방 ‘아’
놓고 지 몸도 추스르기 힘든데, 색시더러 밥 해오라고 그래서 기사 차, 그거 있잖아? 그 안에서 그 똥그란 오봉에다가
밥을 갖다 주고도 꼭 드시라 글고. 우리 넝감 신체 나갈 적에 그 때는 나는 이거 카드 쓰는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를
때라. 지 핸드폰으로 우리 영감 그 나가는 시간으로 우리 아이들 중국에서 울고불고하매, 그때 내가 정신없었지만 지끔
생각해보니까 핸드폰으로 그 국제전화 돈 얼마나 나갔겠어? 그걸 내가 좀 보답할라니 찾을 길이 없어. 그 사람. 그래 내
KBS 방송에다가도 연락을 했는데, 그 후엔 무소식이야. 내가 어예가 찾아서 꼭 보답을 해야 되겄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 그래 이때까지 내가 곤란하게 살았네요. 그래서~ 지금 와서 그래서 국적 취득해서 고향에 돌아오니까 여러
사람 방 좋아, 국가에서 생활비도 나오고 해서 잘 지내고 있고요.
구술자: 김일진
나는 지금 중국에서 건(근) 70년을 지냈지만 태어난 자리는 한국이라요. 전라북도 순창군 적선면 지북리입니다. 내 그
당시,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우리 삼형제를 데리고.. 어험(기침) 북만주로 가서요. 지금 말하자면
할빈(하얼빈), 어째 갔는가 하면 이때는 몰랐지만은... 일본 사람들이 아부지를 군대로 잡을라고 하는 바람에
아부지(는) 군대는 죽어도 안 간다. 가자, 썩은 좁 한 그릇을 먹어도 그래도 중국에 가면 먹는다 함서 이래가지고서
중국에 드가게 되었어요. 그랬는데 거 갔어도 맨 남의 방천을 살고, 하튼 그 먹는 건 맨~ 곤란해요. 정말 어쩔 적에는
서울에 이팝 한 그릇도 못 봐요. 내가 어릴 적의 생각이지만. 그래 또 집에다가 내가. 학교가 또 멀~어요. 그래가 내가
학교를 언제 갔는가하면 45년도 딱 석 달 댕겼어요. 학교를. 학교를 처음에 석 달을 억지로 갔는데. 처음 간 놈이
일본말이 뭔지 아나요? 일본말 하면 뺀다고 세게 때리지. 말 한마디 하면 뺀다고 세게(때린단)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니가 뺀다고 안 맞으면 돈을 얼마 대라 그러지. 고 뭐, 뭐, 참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집에 가서 돈 달라는 말은
못 하지요. 일본말 안 하고 조선말 해서 맞았다 하면 집에 가면 뭐라 하지. 이래가지고 내가 석 달을 공부하다가 거기서
내가 어지(어제)도 간단히 말했지만 이름도 바뀌고, 내가 성이 김가인데 건본을, 뿌리 근자 쓰고 본본 자를 쓰는 이름을
떡 주더란 말이여. 그래가지고 이게 맞는가보다 하고 인제 석 달을 댕겼는데, 학교는 죽어라 가기 싫어. 그래 한 번은
뭐라는가? 내일은 오면 교복을 준다. 그래요. 옷을 타 입고 싶어서 가요. 가 옷 타가지고 이튿날 안 가니까 동료들이
와서 가자가자, 8월달이나 됐나 모양이야. 그니까 한 시간 반 이상을 걸어와야 돼요. 한번은 거 건너 오다나니까 지금
보니까, 땅 크지 그 때 무슨 포심병도 있고 한 게 자동차하고 수백~틀이야요. 근데 사람들도 보니까는 눈깔이가
노~오랗고 머리가 뻘~건 것들이 총을 미(메)고. 근데 후에 알아보니 그게 바로 소련 홍군이란 말이야. 그 지나감서
야근하는데. 그 담에 조용했는데, 그 담에 학교 한번을 가니까 선생님 경찰복을 입고 칼을 차고, 가요. 아니 저. 저
인사를 해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죠. 근데 이 선생님이 들어와 가지고 공부시켰는데. 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에. 1월에
배와줘요. 이 사람들 있을 때는 일본 말 못 하게해요. 다~ 한국말해요. 그때 무슨 노래 배와 줬냐 하면, 또 이승만
박사가 거 배를 저어가자 푸른 바다 뭐 있잖아요? 그 노래를 배운 게 안즉까지도 다는 잘 못하지만 대략 기억은 하고
있죠, 근디 이 선생이 뒷산을 올라가뻐려. 그날 저녁에 학교 그 때는 근데 그 날밤에 불이 다 나 뻐렸지. 근게 그
다음에 지나가니까 그 사람이 바로 지하공작자라는 게지. 이래가지고 학교도 끊어지고, 또 뭘 가지고 있는데 도둑이
많네, 어쩌네 해가지고 쪼그맣게 해서 안으로 이사를 왔어요. 이사를 와서 살다가 나니까 인자 뭐 저 무슨 토계혁명
한다고 그때만 해도 혁명이 뭔지 아나요? 뭘 먼저 뚜드리는가 보면 지주, 부농, 지주는 그저 열에 열이면 다 맞아
죽어요. 한 이틀 죽어~라고 두드려 패지요. 그 패는 것도 보니까 지금도 난 그런 거 못 봤지마는 이런 헉띠(혁띠)에다가
가죽 혁띠에다가 뭐 끄트머리 좀 나오게 그래가 나무에다 매가지고 후리면 이 몸이 다 감겨요. 그게 확 땡기면. 살이
쭉쭉 튀 나가죠. 뭐. 또 거그 구경 안 하면 안 돼요. 학생들 치고도. 그래가지고 이틀 하고서는 서쪽 강변에 가서 총살
해 뻐리고, 총살 해뻐리고 하지. 이걸 보니 겁도 나고… 내가 또 하나 뭐하나 있는가믄, 저… 우리 아버지가 또 붙들려
갔어. 갔다오시드니 그래. ‘흥 개 놈의 새끼들 난 평생에 소 고삐 한~ 번 잡아봤다. 소 내노란다.’ 우리 집에
황송아지가 하나 있었어요. 그거 내주면 투쟁 안하고~ 그거 안 내주면 투쟁해가 죽도록 투드러 맞고 소는 뺏긴다는
게죠. 뭐. 우리 아버지가 뭐라 했다는가믄 ‘내가 숨이 지기 전에는 이 소 못 내노니까 너그 맘대로 해라. 그러고 내가
이 소를 살 직에도 어떠고 사는가, 우리하고 살던 사람이 벌써 10여년 된 사람이 많~은데 그 사람들한테 물어봐~. 내가
누구 돈을 띠 먹었나 누가 일꾼을 하나 댔나?’ 우리 아버지도 고집이 대~단해요. 나도 성질 나면 고집이 있지만. 그래
막으면은. 놔줬어요. 그래 성분을 중농으로 냈다가 빈농이 됐거든. 토지물품이라고 옷도 주고 뭣도 주고 이런 걸
거쳐보니까요. ‘이게 혁명인가~?’ 이랬지. 그러다가 어험(기침). 나도 인자 나이를 먹고 나니 학교를 댕기다 학교가게
됐어. 어릴 때 제가 소학교는 내가 3년을 배왔어요. 한국 소학교를. 3년을 배우고선 중학교 간다고. 우리 아부지도
성질은 못 됐지. 현에 중학교 가면 한 60리를 가는데, 한 35키로 가는데. 거가 학교가 멀었지여. 갈 적 에는 짚신을
삼아 신고 가다 보니까 절반 걸으면 짚신이 다 떨어저 뿌러 맨발로 가지 뭐. 중학교를. 나 공부하러 오고 싶은데 무슨
수속해야 되는가? 하니까 너 그면 구 정부에서 송신하나 띄우라 그래요. 또 그러고 집에 왔지. 송신 띠가 거 가가지고
하는데, 아 이놈은 수학은 그 까짓 거 큰 소리치고 돌아댕기겠는데 중국나라 글자 쓰는 건 안 되겠어요. 그래가지고
내가 이년 반 댕기다 보니까 댕기다 나니까 무슨 문제가 폭발했는가면, 중국의 고급사, 초급사 이거 집채. 농사 진 거
그러면서 ‘야 빨리 들어 온나, 노동력도 적고, 하믄 안 받아준단다. 그러면서 잡아제끼고, 학교에서는 머란가면 ‘야, 너
가지 말고 너 소수민족인데 우리가 너를 안패해 줄 자리가 있다. 그 기차 대가리 모는 학교. 거기에 가라!’ 안 간다고.
그 담엔 저 종이공장에 가라 그래요. 나 안 간다고. 그래 난 집에 가서 농사짓는다고. 그래 그날부터 난 농민이
되뿌렀어요. 농민이 됐는데 사흘 만에 또 대대에서 불러요. 부락이 여럿인데, 묶어논 걸 대대라 하는데, ‘아~ 김동무,
중국학교도 다녔으니까 여 와서 저, 환. 중국에는 공산당이 있고 환조직이 있고 소년조직이 있고. 환조직을 책임지라
그래. 뭐~ 질 놈은 진다고. 그래. 그러고 하다가 나니깐 내가 제일 억울한 것이 뭐신가머는. 시청에서 하얼빈 시에서
소수민족, 여기 말론 뭐라하나? 속성중학교 거그만 가면 석 달만 배우고 나면, 기관의 과장급으로 올라가뻐려. 이놈을
찍어 왔는데 대대에서 안 보내네. 니 보내면 여기 소매공장하고 환공장하고 황난다고. 그래가지고 나도 다른 데가서
서너달 놀다 와 뻐렸지. 그 해 가을에는 또 돈은 다 줘요. 그랬는데 내가 중국에서 살아보니까요, 죽은 사람은 말도
못해요. 그래도 풀을 뜯어먹든지 낭귀를 뜯어 먹든지 하면 그래도 살아요. 그런데 우리 그 뭘 먹는다 그래? 쌀 방아찌면
제~일 부드런 등게, 그걸 비벼가지고 먹고 뽂아가지고 아이들이 먹는데 똥을 못 싸요. 그니까 아이는 똥을 못 싸니까
울지~. 부모 치고는 에험(기침) 그걸 보니 안타까바 울지. 우리가 식구가 몇인가면. 어험(기침) 부모네 있지. 여동생들
둘 있지. 우리 식구가 다섯이지. 내가 지금 딸 너이, 아들 하나 라요. 근데 고생이야 나보다 우리 처가 고생 많지. 내
뭐 대대 돌아다님서 얻어먹는 게 많으니까.
근데~ 이 문제가, 그 당시는 나도 부모네 밑에서, 여자편도 못 들고~, 조금만 잘못하면 엄마 아버지는 ‘이놈의 새끼 너
여편네한테 빠졌네 어쩠네’ 하지. 이게 지금 와서 내가 제~일 허가빠요. 에허(기침) 여자가 고생하는 거 뻔히 아는데,
엄마 아버지가 무슨 말하면 내가 대답하믄 또 배락(벼락)맞는단 말이야. 이게 제~일 참 지금도 속 저린 게 있어요.
말이야 남자가 이래 한다지만. 정말 엄마 아버지 옆에서 이러고 저러지도 못하겠어요. 그저 ‘죽었~소.’ 하고 있어야지.
이러는 판인데. 내 문화혁명은 말 안 하고, 그 담에 사천운동이라 (하)는데, 사천운동은 문화혁명 후기에 경제
파산했는가 무슨 뇌물을 받았는가 이걸 하는데. 내가 그 당시에 무슨 책임을 지고 있었냐믄.
회계책임을 지고 있었어요. 근데 한 번은 현에서 공작대가 여섯이 왔는데, 우리 집에 왔어. 와가지 뭐라냐면, 김동무.
전부 다 개지고(가지고) 가자는 게지. 어디로 가냐? 동치로 가자. 그래 가자. 가니까 그걸 귀짝에다 집어넣고 쇠를 떡
채와. 열쇠 날 달라고. 내가 여기 꿈쩍 안 하는 사이에 당신네 귀짝 열고 무슨 여기서는 영수증이라고 하지. 그 한 장
띠어버리면 내가 다 기억해내는가? 열쇠 달라고. 근게 할 수 없이 열쇠는 주더만. 그 날부터 우리 처가 저 아침점심저녁
밥을 몽땅 날라야 해요. 내가 바깥에 화장실에 간다도 공작들에 하는 거 바깥에서 지켜요. 무슨 나쁜 짓 하는가~ 해가.
근데 인제 그 담에 날이 지나 가니까 ‘당신이 지금 벼를 이천 팔백키로를 타배했다는 게지’. 어 그런 거. 거 참 부자네.
그러지 말고 현 양식 가지고 가서 검사해라. 니 했다 내 했다. 내 안했다 해봐야 다 쓸데없는 짓이다. 내가 밸도 못
했어요. 꼭 그렇다.
대대가 너이 가가지고 일주일 만에 장부를 뒤지다 왔지. 그가 내보고 그래. 급수가 얼만가? 총~ 바친 게 얼만가?
얼마라고. 당신 내 장부에도 얼마지만 그러면 대대회계에도 갔다 물어봐라. 고숫자 내숫자 세 개가 딱 맞지.
떨어지부니까 무슨 지랄을 하는가만. 인자 해방이란 거야. 해방인데. 니가 나를 애믹이나 나도 니를 애먹이나. 애를
맥이본다고., 대대 회계 권성근씨라고 그 장부를 내보고 뒤지라지. 결함있는가 찾으란 거지. 찾아보니 있지.
있어가지고. 밤~중에 내가 그 집에 찾아 갔죠. 찾아갔지. 그 사람이 내 선생이야. 장부상에 이러저러한 문제가 네 개가
있는데, 내가 말해야 처리해준다. 그러니까 머리를 푹~숙이더니 있어. 그러니까 내가 해서 내일 모레 지금 내 여다가는
당신 문책 하나도 없다고 공작대에다 해놨으니까 내 말대로만 접수하라고. 그래가지고 담에 내가 그걸 회하는데
권성근씨라고, 이 사람 문제겄다. 성질은 개차반이어서 하지만은 공작산에 거시기는 없다. 해방시기인데 이게는 나는
없다. 해방했다고 해놨지. 그 다음에는 저녁에 권성근씨가 날 찾아왔어. 야~ 니 땅 내가 사겠다. 그 때 중국 돈으로
해가서 3백원만 넘어가면요, 가정 망해버려. 근데 그 사람이 만년필을 하나 먹었지, 돈 180원 먹었지. 그 뭐 땜에 5백원
돈 먹었어요. 그 담에 나도 거서 가만~히 따져보니 못 살겠어요. 또 이사 때 되가지고 할빈시 또 기어들어갔지 뭐.
들어가서 보니까 한 사람이 그래. 김동무. 그래. 무슨 공장 안 할래? 돈 얼마? 120원. 지금 돈으로 한국 돈 2만원이야.
한 달에. 매일 신이나 쫓아 댕기지. 그랬는데, 내 사장한테 말을 했지. 야 내가 이러 저러한데 내 돈 좀 벌어야 한다.
그니까 그래 하라고. 요즘 그 지표를 보고 여기서는 지표를 보고 뭐라드라? 뭐 종이쪼가리 주잖아. 은행에서 주는 거.
수표? 수표. 현금 바꾸면 만 원짜리면 내가 얼마 먹는 거냐면 사백원 뜯어먹어요. 씁. 나는 실제 농사일은 크~게 안
했습니다. 인자 청도 우리 중국에 우리 토지를 개인지분으로 30년 불변으로 그 때부터 인자 내가 농사졌는데. 농사 질
직에는 내가 식구가 일곱이거든~. 일곱인데, 논은 한 쌍 칠무지기라요. 소작한 것을 혼자 쪼아요. 아이들 학교 가면은
뭐 짚 앞의 밭데기 많아요(손으로 원을 그리며). 그거 하다보믄 지금 생각해보면, 그 그 써레질이 어디 있어? 내가
몸으로 막 끌~치(지). 그래가 종자 뿌리고. 전~부 다 이래 하는데, 참. 나는 농사는 오래 안 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소보다 더 못 되게 일을 했다~ 생각이 들어요.
한 쌍의 몇 무지기를 또 지게로 다~ 지고 가요. 내가. 차가 있나? 돈이 있나? 식구는 많아요. 아버지랑 엄마랑 동생 둘
함께 살던 것이 아이구~ 여동생들이 얼마나 꿍꾸중 했는 건지, 거기는 너이 다 일하는 사람들이지. 우리는 일곱 식구에
나 혼자 일하지. 근게 아부지가 살림나자. 제 식구 제가 살려 맥여야지. 우리가 늘그막에 손녀 손자까지 맥이겠나 하지.
글서 그도 이사나 가 뻐리지. 방법이 없는 거. 그니까 나도 농사짓다 보니까 정말 무스게(무슨 생각) 많이 했나면은
당신은 노동력 적고 식구 많은 이런 걸로 내가 걸렸어요. 그러고 구들 뜯고 벽 바르고, 그 담에 일을 다 하니까 도로 또
산골로 들어가게 됐어요. 아까 당짜 말했는데 나도 입당해가 딱 1년했어요. 예비당원 1년 해봤어. 또 갔다오니까
뭐라하는데. 난 돈도 없어. 그래가 예비 당원 하러 1년 쫓아다녔는데. 이거 가니까 첨에 들어가니까 이쪽에서 농사 확
나고 하니까 그래 봄에 가래질 할 직에 노친네하고 둘이가 가래질 해갖고는 호머(미) 하나 둘러매고 깡낭 씨 들고
앞산으로… 그냥 하면 큰~일 나거던. 그냥 풀밭에 구멍을 뚫버가 깡낭을 두 알씩 넣고 발로 밟아불고 부리나케 한 사흘을
했어요. 밤에. 그러고 하고 들어오면 열 두시에요. 밤. 저 그 담 또 그니까 내는 것도 밤에 가야되고, 뜯어 오는 것도
밤에 뜯어와야 되고 강낭을. 이러고 사는… 나는 참 농민들이 제~일 불쌍하다 합니다. 무슨 계층, 무슨 계층해도
농민들이 제일 불쌍합니다. 그리고 그 담에 빼내고 내가 간단히 하겠는데, 고 저 여기 한국에 오는 것도요. 우리
처남들이 먼저 왔다 갔어요. 왔다 갔는데, 처남이 저 서울에 있는데, 임석순이라고.
아 주소를 배끼가 왔어. 근게 우리 노친이 편지를 쓰지 뭐... 계속 편지만 쓰는 판이지 뭐. 하루는 뭐야. 정말 편지가
답변왔어요. 우리 처가, 이씨네 집에서는 큰집이 적은 집인데, 나이로 치믄 나이가 제일 많은 게지. 다들 누이라 하지.
누이라 하는데, 편지가 왔는데 고모들이 보고서. 하나 해줘라. 불쌍하다. 그래 가지고 그쪽에는 돈을 한국에서 내는데
왕복 비행기 값, 홍콩에 와서 자고 먹는 돈, 다~ 이쪽에서 책임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 쪽에서 여권을 비준 안
해줍니다. 그래 가지고 정말 둘이 오는데, 인천공항이 아니고 김포 공항이라요. 거기 내려가지고 누가 처남인지
매형인지 아나요? 보이지도 않고 듣지도 못했(는데), 그거 뽈 바람 늫는거 있잖아요? 그걸 약속했지. 누님하고 매형하고
하나씩 손에 들고 내려라. 그래야 우리가 안다. 그래 가지고 나오니까 알아봐. 알아봐 가지고 떡 왔더니. 그럴 직에도
와가지고 맘에 터지는 게 하나 있어요. 내가 올 적에는 약을 많이 뗍니다 중국에서. 청심환 사슴뿔이네 지진~ 약을 많이
해왔는데, 하 이놈은. 믿는 도끼에 발 찍히더라고 처남들한테. 처남이 오랜만에 한국 구경해. 약은 내가 팔아줄게. 다
줘삐맀지. 줘 뻐리고. 석달씩인데 저 어디 어디 순창에 큰 집이 있어요 우리 형님이. 세상을 떴고. 거 갔다 왔는데 내일
간다고 비행기 다 해놓고 있는데, 처남이. ‘매형’, ‘와 그러노?’ ‘가방하고 약보따리 싹 잃어 먹어 버렸어요’ 하.. 내
안 된단 말도 못하고 또 울며 어찌 잘못했나요. 내가 개원 숫자가 있는데, 뭐뭐 팔지 청심환 몇 알 팔았다 얼마~ 녹용
얼마~ 있는데 따져본 게, 절반도 못 팔았네. 내가 준 것도 다 계산해서. 근데 손에 얼마를 줬나 했더니 딸라로 2만
4천딸라 됐어요. 다 팔믄 한 5만 달라 되지. 근데 2만 4천달라 쥐고 한국을 떠났어요. 떠나 노니까 집에서, 우리 셋째
딸이 허리를 다쳤어요. 우리 집에서 죽네 사네 하더만 가니까 돈을 뭐 쓸 때 있나? 새끼 하나 살리자. 그 담에 허리를
수술할라고 하는데 노친네도 반대하지, 저 신랑도 반대하지, 딸은 쪼만한 거 하나 있는데, 이런 아도 죽이고 돈은 내가
대마. 그래가지고 수술을 떡~ 했는데, 척추를 세 개를 뽑아내고 그 담에 여기서 허리까지 짜개가지고 제 갈비대를 네
도막인가 또 끊어 가지고 거기다 보태줬단 말이야. 찡과줬지. 이랬는데. 큰 수술을 하면 죽은 거는 한가지지. 원래는 네
시간이면 나온다는 게 여덟 시간이 넘어가 수술해 나오니까. 사돈네 집에서는 설마 뭐 며느린데, 기껏 며느리꺼 댄다는
게 중국 돈 200원. 에이~ 있다가 저 사돈에 서이서 돈 80원을 먹어버렸어. 딸아가 살아가지고 그래도 중국에 어디 왔다
갔다 합니다. 지금 다섯번째 왔는가 한 달 있으면 한국에 또 와요. 돈 없으면 새끼도 쓸데없어. 곤란하니까 새끼도
생각이 안 나요. 한국에 왔다간 돈, 또 이놈의 딸 또. 수술 다 해주니까. 아부지. 와그라노. 나 석주 갈라면 아부지가
집 하나 사줘야 돼. 아 또 집 하나 사달라네. 이거 안 된다 하겠나요 된다 하겠나요? 그래 할~ 수 없이 노친이랑
상의해가 집 사칸짜리 하나 사줬지. 아 이놈도 허리 그러니까 일 제대로 못 허지. 나도 지금. 여기를 내가 90년도부터
석 달내가 네 번 만에 나왔는데, 어이됐는가면 노친네는 여기다 호적 올린다 그래요. 그래 내보고 올리라고. 그래
출입국에 가니까 와 아저씨는 안올려요? 난 안올려. 그러고 와가 내 그 길로 내가 중국으로 가뿌렸어요. 부르네 안
부르네 하고 내가 근 60년을 피땀으로 일구어 논 살림이 있거든. 저 아파트, 사층아파트가 하나 있지. 집안의 살림
고대~로 있는데, 그게 아까버 내가 호적을 못 올리겠어요. 내 가가지고 한 일년 반 있었는데. 내 또 언제 왔는가? 또 온
후로부터 문제가 있어. 내가 케이트 볼을 십 몇 년 쳤어요. 근데 거기서도 중국서도 치는데, 한번은 케이트볼
치러가니까 한 사람이, ‘야 저 무슨 영감 죽었다.’‘와 죽었노?’ 영감이 혼자 남에 집에 있지, 아들이 할빈서 돈을
부쳤는데, 전화 안 받지. 그러니까 아들이 친구한테 전화를 쳤지. 너 우리 아부지한테 가봐라. 내가 돈 부쳤는데
아부지가 받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근데 가가 털레털레 가보니 아버지가 죽어 가지고 있더라는 것이지. 그러니 전화를
받지도 못 허지. 내가 여기서 돌아섰다 말이야. 우리 노친네와 만난 지가 57년 되었어요. 지금 57년 됐는데 혼자 있다가
죽으먼 쥐도 새도 모른다. 가자. 죽든 살든, 어험(기침) 우리 영감 노친이랑 가자고. 내 중국에서 해가지고 오는데는…
중국에는 좋은 점 있나? 65세 이상만 되면 비자를 잘 내줘요. 고 비자로 왔다갔다 해얀게 왔지. 아 노친네. 그래, 와 안
온다 하더니 어째 왔어? 야! 너 혼자 있고 내 혼자 있음 누가 죽은 지도 모르고, 야야 집구석에서 썩는다 썩~어. 내
그럴려고 함께 할라고 왔다고. 그래가 나도 호적에 올맀는데, 지금 여기 와서 보니까 나는 일생에 여기서 제~일
행복하다고 합니다. 일도 여기 와서 일을 할라면 나이 많다고 안 시켜주지. 그래서 무슨 짓을 하는가만, 늘그막에는
단련하고 몸을 움직거려야지, 케이트 볼은 계속 치지만은. 경제도 보태고 술값이라도 보탤라고 나 빡스 줍습니다. 하루
2000원씩은 놀면서 버는데, 한번 나가면. 이거 빡스 줍는 것도 신체 단련으로 하고, 경제상으로도 합해지고 내
신체상으로도 좋잖어. 어떤 사람들은 하~ 김동무 뭘~ 일흔 여덟이야, 한 칠십으로 보인다고. 그럼 고맙다. 케이트볼
치고 박스 줍으면 젊어진다. 노인들은 케이트볼 치는 게 뛰댕기지 않고 제일 좋은 운동이다~. 내가 지금 12년인가
13년인가 쳤어요. 우리 노팀도 함께 치고 댕겨요. 어제도 안 그래요? 거 돈 주~지 양식주~지, 낼 모레도 동사무서서
오랍니다. 짐치 준다고. 뭐 병 봐주지, 머리 깎아주지. 뭐 한 게 있어요. 중국에서 그런 법 없어요. 나도
중국동포연합회 있지만, 봉사하는 거 했습니다. 저 큰 길에 담배꽁초도 쓸고. 뭐 하람서 다~ 하지. 이것도 나한테는
일이라고 하는 거는 나는 신체단련이라고 해. 내 간단하게. 미안합니다!
우리는 고려 사람
손승현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쫒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쫒기 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 다른 고향” (1941,9)
카자흐스탄 고려인 송 라브렌티 감독의 영화 《고려사람》은 네 명의 중앙아시아인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러시아, 쿠르드 출신의 이들은 고려 말을 유창하게 구사한다. 영화에 나오는 마리아 코발렌코
할머니는 고려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고려인이 어떻게 카자흐스탄에 왔고 정착했는지
이야기한다. 아울러 현지인에게 고려인은 어떤 사람이었고, 다민족 공동체에서 어떤 문화적 위치의 사람이었는지
증언한다.
2022년은 고려인들이 연해주로부터 6,000㎞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지 85년 되는 해이다. 고려인의 역사는
19세기 후반 한인 동포들의 연해주 이주로 시작한다. 1874년 한인 동포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개척리’라는 마을을
만들었고, 다시 마을을 이전해 ‘신 개척리’, ‘신한촌’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본격적인 러시아 이주는 일제의
식민 체제가 본격화된 1910년대 말경에 이뤄졌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체제는 1920년대 말부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당시 집권한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펼쳤다.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이 강한 고려인들은 늘 경계 대상이었다. 고려인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숙청되었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중국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같은 날 고려인 강제 이주에 대한 결의문도 채택된다.
일본 첩자의 침투와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차 강제 이주는 결의문 채택과 함께 1937년 9월
21일까지 시행되었고, 2차 이주는 9월 24일부터 10월 25일 사이에 강행되었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인근 우슈토베
지역,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남부가 주요 강제 이주 지역이다. 카자흐스탄에 20,170가구 총 95,256명 이주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 76,525명이 이주해서 총 171,781 명이 이주했다. 하루아침에 수많은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6,000km 떨어진 반(半) 사막지대인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강제 이주 되었다. 아니 버려졌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각지로부터 10개 이상의 여러 다민족 또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강제 이주가 진행된다. 이렇게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에 모여든 소수 민족은 약 2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각기 콜호즈(협동농장)를 이루어 한 공동체 속에
녹아들며 조화를 이루면서 살았다. 스탈린이 사망하자 흐루쇼프는 1957년 이후, 중앙아시아로 내몰린 유민들 중
상당수를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다시 러시아 연해주나 우크라이나 체첸, 동유럽과 중동으로 이주한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한국으로 노동 이주 중이다. 이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로 이주했지만 이들의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공통의 기억은 1937년 시행된 강제 이주다. 강제
이주 후 형성된 다문화 사회, 다문화 집단 농장에서의 다민족 문화의 경험,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생활 경험은 이들이
새롭게 이주한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 공동체 생활 이루는 기반이 되고 있다. 고려인과 유대인, 체첸, 우크라이나,
쿠르드, 러시아인은 결혼과 교류 등을 통해 이웃과 가족이 되었고 새로운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안산 원곡동에 이주해온
많은 고려인 후손들을 둘러싼 다문화의 삶은 이미 그들이 살던 국가에서 경험한 일상적인 삶의 형태이며, 의식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하고, 태어난 곳을 떠나 삶을 꾸리는 곳을 타향이라고 한다. 지난 100년간 계속해서 넓은
대륙을 떠돌 수밖에 없었던 고려인에게 고향과 타향은 이리저리 분열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들 삶의 발자취가 거친
대륙을 휘젓고 다닌 것처럼 수십 갈래로 다시 흩어지고 있다. 고려인 상당수는 가족의 묘지가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의 분열된 정체성은 현재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 조국을 떠난 고려인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1960년대 이후 구소련, 러시아 전역과 유럽 그 외의 지역으로 다시 흩어졌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이후의
고려인 역사는 오늘날 찾아보기 쉽지 않다. 지난 몇 해 동안 고려인의 이야기를 듣고 직접 현장에 가서 촬영할 기회가
있었다. 이토록 척박하고 거친 대륙의 황무지를 살아갔을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고려인 동포를 대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이들의 생존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담는 방식이 예술사진이든 다큐멘터리이든 아카이브이든 기념사진이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한 분 한 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상처 입은 이야기가 하나씩 하나씩 가슴속에 담겨왔다. 떨리는 눈빛,
울먹이는 눈망울, 구슬픈 노래, 긴 한숨이 들릴 때마다 그들의 이야기가 단순한 회고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작곡가 故 한 야꼬프 (1943-2021)선생님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우리는 고려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고려 사람〉 작업 일지
2012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동포와의 만남 시작, 콜호즈(협동농장) 방문
2013-2015 러시아 사할린,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고려인 동포 개인 생애사 인터뷰 시작(약 30인 인터뷰)
2016-2017 상반기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슈토베(강제 이주 첫 정착지) 현지조사, 인터뷰,
촬영
2018, 7-8월 우즈베키스탄, 투루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고려인 집단농장지역 방문
2022 〈우리는 고려 사람〉 온라인 전시
2023-2024(예정)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러시아 도시들(스탈린 그라드, 모스크바 등) 현지조사, 고려인
인터뷰 및 촬영
2025-2028(예정) 체첸,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젠, 아르메니아, 폴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현지조사, 고려인 인터뷰,
고려인 공동체 사진작업, 사진 아카이브 수집
고려인사회의 과거와 현재
김병학
(월곡 고려인 문화관장)
옛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은 스스로를 ‘고려 사람(또는 고려인)’이라 부른다. 그들이 자신들을 이렇게
불러온 역사는 결코 짧지 않으며, 이미 1920년대에 이 명칭은 널리 쓰이고 있었다. 물론 고려인의 역사적 여정은 한반도
근 현대사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었던 까닭에 8.15해방과 남북분단, 그리고 1948년 한반도 이북에 소련이 인정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진 것을 계기로 고려 인들의 공문서에서는 ‘조선인’이 ‘고려인’을
오랫동안 대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상에서는 여전히 ‘고려 사람’이 보편적으로 쓰였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되자
이들은 ‘고려 사람’이란 고유의 명칭을 완전히 되찾아와 정착시켰다. 이렇듯 고려인의 명칭 확립의 역사는 그들의
정체성 확립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고려인은 다른 지역의 해외 한인에 비해 이주 역사가 길고, 거주국 정부의
가혹한 정치적 탄압을 받아 고국과 물리적으로 단절된 곳으로 집단 이주 되었다는 점에서 한인 디아스포라 의 전형으로
불린다. 고려인은 159년 역사에서 4차례에 걸친 대 이주를 경험했다.
첫 번째 이주는 1863년부터 함경도 국경지역 주민들이 자연재해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으로
생계형 이주가 주류를 이룬다. 이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던 것이 1905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항일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이 대거 연해주로 건너가면서 이주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그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다수의 한반도 지식인과 애국지사들이 모여듦으로써 고려인
항일애국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일본군이 깊숙이 개입한
시베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고려인들은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해 우리나라의 독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1922년 말
일본군이 물러가고 사회가 안정되자 이후 10여 년간 연해주 고려인사회에는 민족문화의 황금기가 도래한다. 고려인들은
국가정책에 발맞춰 집단농장(콜호즈)을 건설하여 공동체의 경제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한편 민족자결권이 명시된 소련
헌법에 기초하여 교육계몽운동에 매진 하였다. 그 결과 1928-33년 사이 연흑룡주 일대에 380여 개의 민족 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었고 17개의 개의 크고 작은 모국어 신문이 발행되었으며 출판 활동도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다. 또
1932년에는 세계 최초의 우리말 전문 연극 극장이 설립되어 바야흐로 고려 인 민족문화의 봄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일부 고려인 지도자들은 민족의 권익향상과 민족 자치구 획득을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고려인 문화의 전성기는 그러나 1937년 극동 고려인들이 압제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로 집단 강제 이주 되면서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게 끝나고 말았다(2차 이주). 이것은 고려인을 전형적인 디아스포라로 만든 통한의 이주였고
한민족 해외이주사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극도로 비인간적인 이주였다. 강제 이주는 1937년 9월 9일에
시작되어 그해 말까지 연해주, 아무르주, 자바이칼주에 살던 17만여 명의 고려인이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강제 이주는 고려인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이주 몇 해 전부터 2,500여 명의 민족운동 지도자와 명망가, 지식인이
체포되어 대부분이 처형되었다. 강제이주 된 첫해 겨울에는 가혹한 기후와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2만여 명의 어린이와
노약자가 목숨을 잃었다. 1937-1938년에 중앙아시아 고려인 집성촌에는 부모를 잃은 자식 들, 자식을 잃은 부모들,
혈육을 잃은 형제자매들의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인들이 마주한 땅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진펄과 갈밭과 소금밭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 봄부터 갈대를 베고 땅을 고르고 수로를
내어 물을 대고 볍씨를 뿌렸다. 또 파산상태에 빠진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집단농장을 재편해 가장 모범적인 농장으로
변모시켰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고려인 집단농장들은 괄목할만한 농업생산성과를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고려인
노력영웅(노동영웅)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소련 전체인구의 0.2%도 되지 않은 고려인이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20,605명에 이르는 전 연방 노력영웅 중에서 209명이나 차지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고려인이 강제 이주된 지도 어느덧 16년이 흐르고 압제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사회에는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그동안 주거지 제한 규정에 갇혀 외부로 나갈 수 없었던 고려인 에게도 1956년부터 거주이전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이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교육과 직업선택의 기회를 찾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등지의 여러 대도시로 진출했다(3차 이주).
이 시기에 다수의 고려인이 소련 전역으로 흩어짐으로써 고려인은 대표적인 분산 민족이 되었다. 젊은 세대 고려인들은
개별적으로 성공하여 속속 소련 주류사회에 진입하였다.
이와 동시에 민족문화의 위기도 찾아왔는데, 분산 거주와 젊은 세대의 모국어 상실로 인해 민족문화기반이 와해 될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려인들에게는 모국어신문과 우리말극장이 있었다.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고려일보’와 1932년 같은 곳에서 설립된 ‘고려 극장’은 강제이주의 불 바람을 능히 견디고 살아남아 모국어와 민족문화
부흥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이 기관들은 선조가 물려준 민족얼을 지키며 척박한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 한글 문학과
모국어문화예술을 활짝 꽃피웠다. 이에 발맞춰 모스크바에서는 1950년대에 일단의 학자들이 10여 권의 모국어 교재를
간행했고, 중앙 아시아에서는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1958년부터 1990년까지 15권의 한글문학작품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는 고려인 지식인들이 모국과 멀리 떨어진 고립된 환경 속에서도 강력한 러시아어와 소비에트
문화의 비바람을 이겨내고 이룩해낸 민족문화의 더없이 값진 열매였다. 헌데 고려인에게는 유랑의 삶이 숙명처럼
따라다녔다. 이들이 중앙아시아에 들어간 지도 반세기가 지나 점차 뿌리를 내릴 즈음 이들을 또다시 끝없는 유랑의 길로
내몬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영원한 열강으로 존재할 것만 같았던 소련의 붕괴였다.
소련이 해체되자 고려인이 집거해 사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사회적 혼란과 경제위기가 초래되었고 이에 편승하여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이 발호하기 시작했다. 불안을 느낀 10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다시 유랑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
마지막 이주자들의 주요 목적지는 러시아와 그들의 역사적 조국인 대한민국이었다(4차 이주). 현재 우리나라에는 8만여
명의 고려인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이들은 안정적 체류와 정착 문제 등 여러 가지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며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내고자 갖은 애를 쓰고 있다. 한편 고려인의 생활양식은 소비에트 체제 내내 다양한 변화와
굴곡을 겪었다. 세시풍속과 전통 명절들은 1920-30년대 소련 전역을 휩쓴 사회주의적 계몽운동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하나 둘 자취를 감추어 나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한식’만은 이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옛 전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전승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한식날만 되면 모든 고려인이 아침 일찍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의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느덧 시대가 바뀌고 사회적 여건이 무르익자 고려인들은 1990년대 초반, 가장 먼저 설날을 복원하여 민족 최대의
명절로 경축해오고 있다. 이와 같은 전통 명절과 돌, 혼인, 환갑 같은 개별 통과의례 잔치를 치르는 날이면 고려인의
식탁에는 어김없이 고유의 음식이 가득히 놓인다. 이들이 평소에 먹는 음식도, 일부 타민족 음식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밥, 김치, 된장, 두부, 국, 나물 등이 주요 메뉴로 등장한다. 이렇듯 고유의 음식은 외부의 오랜
침습에도 불구하고 거의 변화를 겪지 않았다. 이는 고려인의 참모습과 본질을 뚜렷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술자: 이병옥(1933년 출생, 사할린)
이병옥은 1933년 사할린 주 마카로프에서 태어났다. 5남매 중 위 두 오빠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셋째 오빠와 이병옥,
동생은 사할린 주 마카로프에서 태어났다. 이병옥은 사할린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3학년 때쯤 전쟁이 심해지자
학교에서는 공부 대신 근로봉사로 밭을 매는 일을 시켰다. 그 뒤, 5학년을 마치자마자 해방이 되어 학교에 공부하러 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처음 봤던 러시아 군인들이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둘째 오빠는 일본으로 간 후 연락이 끊겼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큰 오빠가 일을 시작했는데, 어느 날 둘째 오빠가 일본에서 밀항선을 타고 돌아왔다. 이후 둘째
오빠는 미사일 만드는 프레스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마을에 악단이 오고 이병옥은 큰 오빠를 통해 악단인 남편과 만나 52년 12월에 결혼했다. 1956년 악단의 악사들이
흩어지면서 파원 되었지만 남편은 사범학교에서 음악선생님으로 일하게 된다. 아들을 대학에 보내 졸업까지 시켰다.
90년에 페레스트로이카를 겪어 많은 고생을 했다. 한국에서 기업가들이 오고 일본에서도 많이 들어왔는데, 이병옥의
아들과 수산물 사업을 함께하는 자가 찾아와 일을 허락했다. 5년이 지나 아들이 사장이 되었다. 지금 아들은 사할린
주정부에서 사할린 건축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딸은 손자와 영국으로 갔다. 딸이 낳은 손녀는 영어, 일본어 통역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병옥과 남편은 1998년도에 영주귀국 대상이 되어 인천 삼성동에서 2년 살다가 지금의 안산
고향마을에 2000년에 입주했다.
저 한국말 할 때는 일본 악센트 있다는 걸 느낍니다. 내가 항상 얘기하고 거기 사할린이 해방되니까 일본 시대에는
조선말 안 썼거든요. 이제 해방되고 조선말을 쓰게 되니까 또 사람마다 말투수(말투)가 다릅니다. 북한 말투수로도 하고
말투수루로도 하고 저는 일본말 잘하고 댕기는 사람이니까 한국말 쓸 때 악센트 있는 건 웃깁니다, 제가. 악센트 고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할 수 없지요. 저 1933년생인데요. 마카로오라는 곳에서 탄생했습니다. 오빠 둘 다 일본에서 낳았고,
사할린에 와서 저 위에 오빠 하나 낳고, 저 낳고, 제 동생 이렇게 낳았어요. 그... 야적 살 때니까 사할린에서 학교를
다녀야 되니까 학교를 들어갔어요. 일본학교... 촌이라고 하면 촌이고 시라면 시고... 이제 거기서 학교를 다녔는데,
오모니는 안 데려갔어요. 오빠가 데리간 거 같애 학교... 세에라 스쿨 학복, 있어요. 일본 시대에 입는 거. 뒤로 이런
각으로 된 에디인데 거기 흰 줄을... 두 줄을 이렇게... 해군복. 그 까만 주름치마 줘서리.. 그렇게 하고 공부하고
있는데, 우리 큰오빠가 고등학교 공부를 했었고, 그 둘째 오빠가 6학년... 셋째 오빠가 5학년, 저가 4학년, 저가 1학년
하구나... 동생은 아직도 안 들어갔거든요. 거 공부하고 있는데 북에는 또 큰오빠가 있어요. 배다른 큰오빠가... 그
큰오빠가 일본시대 때 16살 때였던 거 같애요. 제가 7살 때 마카로오라고 있어요. 일본말로 ‘시르도조’ 큰 도시오.
거기서 살았는데... 왜 거기서 살았는가 하먼, 배다른 오빠가 지금 우리 친오빠하고 나이차이도 많고 일본사람이니까
카지아 그 카지아? 카지아 주임이라고 카지아라고 칼 같은 거 가는... 그 주인이가 우리 아버지한테 도상~, 일본말로는
도상 도상 그랬어요. 뭉스코치 저한테 맽기달라고 자기가 공부시키가지고 출생시키가…
오빠가 본이 좋았어요. 그 제가 잘 알지 못하지만 얼굴은 알아요. 그래 아버지가 그러면 그렇게 하라. 얼마 안
떨어졌어요. 한 4~5키로미터 떨어졌어요. 그 하고 있는데, 그 주임이가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일본 데려가서
자기가 일본에 가서 출생시키겠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허락해서 갔대요. 그때 우리집이 다 떠나간 거라 그때 일본을
갔어요. 우리는 우리끼리 살고 있는데, 그때 1학년, 2학년 공부하고 있는데 전쟁이 심하게 되니까 3학년인가 4학년 제가
되니까 공부도 별로 안 하고 그 저 군대로 나간 지간을 아니 그 어떤 저 군대로 나가지 않습니까? 그럼 그 집을
도움허로 가는거에요. 공부하는 대신에, 감자도 지수내러 가고, 또 그 밭대기에 일시키는 거에요. 학교에서. 오늘은
어떤 집에 가서 밭 좀 매시게... 히로꼬시 타는거에요. 고게 여름 내내 그걸 했어요. 그리고 어떨 때는 또 길에서
자라나는 미츠바라고 있잖아요. 그거 뭐라 한데? 미츠바라 크로바 있죠? 가을이 넘어가면 노~랗게 시들지 않습니까?
그거 씨를 모으러 댕깁니다. 댕겼습니다. 그거 모아가지고 군부로 보내가지고 군인들한테.. 그래 갖고 군인들은 그거 또
거기다가 심어가지고 길러가지고 누구한테 또 맥이는 모양이에요. 마을 같은 분위기 그거 허러 댕겼어요. 아니요 그
씨만 네, 씨만 그런 일 많이 했어요.
지금에는 사학년 오학년 저 오학년 오학년 졸업하자마자 해방 되뻐렸어요. 그다음에 거기 딱 그전에는 공부도 잘
못했어요 겨울에, 겨울에... 공부나 좀 할까 학교가 얼마나 먼지 걸어서 네키로나 걸어가야 되요. 네키로 걸어 대니면서
공부를 했는데요. 여름에는... 겨울에는 어떤 때는 스키도 타고가고 여름에는 걸어서 가면 돼요. 거기는 걸어서 가면
돼요. 그 저~ .. 가는 도중에 그거 있어요. 사람 돌아가시면 태우는 그게 뭐라하지? 야끼바라스? 화장장? 길 옆에 딱
있어요. 길이 옆에, 화장장. 그럼 어떤 때는 여름 때 꽝꽝꽝하면 아휴~ 거기 혼자 댕기기 무서워서 혼자 막 뛰어요.
공부할 때 집에 가게 되면 여름에는 고 가는 길이 겁줘요. 무서버서. 뭐 별로 무섭진 않지만. 일본 사람들이요. 어떻게
해야 되나. 시체를 강에다가 싣고 마루판에다가 싣고 댕기거든요. 그러면은 흰 꽃 이렇게 떨구고 댕깁니다. 길에다가...
그 흰 꽃보기 싫어서 막 이렇게 다닙니다.
그렇게 5학년 6학년까지 그러고 다녔어요. 그리 해방되가지고 그랬는데, 해방될 때까지는 일본에서 그 배다른 오빠랑 다
형제들하고도 그랬는데, 한번 그 배다른 오빠가 편지가 왔어요. 이제 그 친 큰오빠한테.
그때는 내가 시코쿠 있드라구요. 일본 시코쿠 사는데, 순사, 경찰순사 경찰소에서 일하는데 그때는 조선팔도라고
있어요. 조선팔도 거기 댕기면서 이렇게 다니가. 저 몇 달 한번 댕기면서 일을 한다고 하니까, 여기 친오빠가 “형님,
세월이 어떻게 될란지는 모르겄는데 그 일은 그만두고 다른 일을 했으믄 어떤가?” 그래서 그 큰오빠가 생각하기를...
그러면 동생 말 듣고 그 일을 그만두겠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가 하니까 운지꼬조로 들어갔어요. 전쟁 무기를 만드는
거기... 제일 큰 공장에 갔어요, 시코쿠. 네. 그르니까, 거 큰 무기 만드는 공장... 거기서 일하면서 거기 들어갔다
하면서 자기 결혼했다 하면서, 경찰서 부장 딸 하고 결혼했다하면서, 이래 딱 사진이 왔어. 일본 마루나미를 요렇게
해가지고 사진이 왔어. 결혼을 했다. 그런가 해서... 그래서 딱 길이 막혀버렸어. 길이 맥히니까 편지 오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무소식이에요. 그러다 사십.... 오년도에 그렇게 됐는데...
우리들이 일본으로 보낸다고 해서 칙? 속달을 보낸다고 해서, 여자들만 쉽게 항해를 보낸다고 해서 우리들이... 한
오빠는 일본을 가있고, 그 도꼬다로 들어갔고, 무소식으로, 무소식이요. 둘째 오빠가 그렇게 도꼬다로 들어가가지고..
나머지는 있는데, 큰 오빠하고 셋째 오빠하고는 남으라고 그 밑에 애들은 데리가라고 그 명령이요. 시끼 항해 그...
영도귀를 시키겠다고 일본으로 네~ 인차요. 그래 어데까지 왔는가 하몬, 일본에 사할린 도오린스크라고 있어요. 오짜리?
러시아말로 도오린스크 일본말로 도체하리 오체하리인지? 거기에 큰~ 학교 있어요. 거기에 우리 모았어요.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이렇게 다 모았어요. 여자들을, 그리고 작은 아들 데리고 와서 여럿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하네, 폭탄이
떨구는거요. 누가 던졌는가 모르지만... 저 사람 떨궜겠지. 학교 앞에 딱 떨군거에요. 그리고 저희는 놀~래가지고
쇼이단. 일본말로 쇼이단. 학교 바로 옆이라 하지만 조금 떨어뜨린 곳. 우리한테는 아무 영향도 안 오지만...
떨어졌어요. 우리는 무서버서 가만히 앉아있는데 먹을 거는 그 밥, 그 주먹밥, 니그리민시. 아침에 낮에 저녁에 그렇게
줬어요. 어제는 러시아 사람 넘어왔다 해 갖고, 스도프. 길을 스도프시켰어. 그래 못 가니까 거기 들어가서, 본집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사는데... 마음이 그저 왕래 못하지, 편지 왕래도 끊어졌지, 다 낙심해가지고 앉아있는 거에요.
저희 어머니는... 아이고 둘째 아들 병권이... 가도 죽었을끼가. 그러자 시코쿠, 배다른 오빠가 아메리카 군대
들어가가지고 제일 첨에 들어가 강 뭐라 하는데? 제일 심하게 됐어요. 심하게 했는데, 다 그 절명했는 모양이에요. 전쟁
나서 크니까. 그래서 그렇게 있는데 제가 그 때가 열세 살, 열세 살이었어요. 열세 살에 그 다음부터는 러시아 한
사람씩 군대가 들어오니까 처음 보니까 얼마나 무섭소? 코도 크고 노란 머리고, 러시아말은 한마디도 모르는데...
근데 한 번은 러시아 사람이 여자가 이만한 머리... 긴 머리 해가지고 고시랑 머리해가지고 이~쁜 여자가 분대장을
데리고 왔어요. 맻 명. 우리 인제 거기 강당에 강당에 있는데, 다 모으라 해서 그여자가, 이쁜 여자가 러시아 사람인데
참 이뻐요. 그 군대들을 한인 몇 데리고 왔는데 그 여자가 그 여자가 옛날에 일본 시절에 사할린 살던 여자래. 백 백
백노시아. 일본 그 조마꼬있죠? 다 졸업한 사람? 여자가 얼마나 일본말을 잘하요. 그때 통역을 하면서 그런 일도
있었고... 근데 우리는 러시아말 한마디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 일본 사람들은 하나하나씩 자기나라
가기 시작하거든요? 근데 엄마한테 우리들은 언제 갈까 하는데, “모르겠다. 그리고 조선사람 가는 사람 없는데 자기네들
종자들만 데리가라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렇게 주저앉아가지고 또 다른 기약도 없고, 또 소식도, 라디오도 못
듣고, 라디오도 못 듣게 했어요. 탁 끊어가지고. 그래 할 수 없이 그렇게, 일 년 있다가 이년 있으니까 또, 조선학교도
열어주고 쪼끔 열어주고, 너희들은 어떻게 살겠나? 앞으로? 일본 사람들도 다 왜놈들이, 그때는 왜놈들이라 했어,
어머니가 얼마나 부애가 났는지. 왜놈들은 자기 종자들만 데려가려고 하고 어떻게 하겠노. 그때 우리 오빠네 남은, 셋째
오빠 그래 셋째 오빠하고 큰 오빠는 그때 어디서 일을 했는가 하몬, 그 아버지하고 친한 사람이 있었어요. 친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 친구가 우리 어머니한테 너 큰아들이 내한테 좀 맽기면 어떤가? 우리 어머니 절대 못 맽기겠다.
둘째 아들도 일본에 가서 무소식인데 집에 방 봐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절대 맽기지 못하겠다. 큰 오빠. 우리들한테
맥여야 하니까 거기서 한… 일 했어요.
근데 일하고 이렇게 나오는데 하루는 우리 둘째 오빠가 일본에서 왔다고 어찌어찌 3년이나 지냈어요. 왔다 하거든요.
둘째 오빠가 어떻게 일본에서 어떻게 왔겠는가 해서, 우리들이 그 날에은 친구네서 엄마 집에서 자고서 있었는데 그
소식이 들와서 뛰서 막 집으로 갔어요. 둘째 오빠가 일본에서 왔어. 어떻게 왔는가 하니까? 이만저만해서 이렇게 저
도룻배(도둑배, 밀항선)타고 왔는데, 근데 거기 호오모스그란드? 요새말로 마오카라고 일본말로 도착했어요. 도착했어.
마오카 호옹스. 근데 감옥에 사흘을 있다가 왔다하면서 왜 하는데 일본 군대들이 여기 하머 들고 대녀요. 무리 엮고
댕기는지 뭐 그거들고 댕기는데, 댕기 가지고 오다가 아 이거 보니까 군대라 하면서 삼일만에 감옥에 들가지고
왔는데...
왔으니까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 했겠어요. 죽은 사람이 왔으니.. “너 어떻게 왔니?” 하니까 일본에서 듣기는, 사할린은
다 절명 되가지고 재로 됐다고, 자기가 지금 홋카이도서 왔는데 어떤 처녀하고, 처녀하고 어떻게 눈맞아 가지고 그
집에서 있다가 사할린 사흘만 갔다 오겠다 하면서 왔는데, 왔으니까 못 가지요. 그래서 주저앉고 풀썩... 그 오빠가 이
얘기하면 인제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도꼬따이로 가는데 오도마리라는 데서 배를 타고 도꼬다이를 가야되는데, 죽을
맥이드래요. 죽, 죽을 맥이는데 밥을 쌀밥에다가 열 여덟개 들어 있대요. 그때만 해도, 그리 홋카이도 내려가지고
동경으로 보냈는데 , 옷 싹 갈아 입히고 신발도 특별하게 주문해가지고 신기고 발이 좀 커요. 키도 크지만. 그래 거기서
연습하는데 절반은 나무로 만든 비행기, 절반은 철로 만든 비행기, 그거 훈련하는데, 돌아오는 기름은 안주고 가는
기름만 이렇게 주고 그렇게 연습하는데 그렇게 연습하고 있는데, 그때 일본이 손들었다 하면서 그래 해방이 왔지요.
그때 홋카이도에서 배를 타고 왔지만. 그 다음에 그 오빠는 어디서 일했는가 하면 그... 그거 현재상 그거 뭐라합니까?
철같은거 세제스티? 내리 가지고 그거 하는 거? 뭐라하지? 선반을 들어갔는데... 오빠 우리 둘째 오빠가 머리 좋은
오빠에요. 근데 한번은 집에서 말하는데 이게 비밀인 거 같기도 하면서 “무슨 비밀이요?” 하니까 크~은 철을 가지고
왔는데 끊으라 하는데 끊긴 끊었는데 어디다가 쓰는가 모르겠다 하고 있어. 그 끊어 논게 있는데 자꾸 오빠가 그
생각하는 거에요. 이상하다 그거 어디다가 쓰는가 모르겠다. 쓸 때도 없을긴데 싶어서 하면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걸 여러 군데 퍼져 놓은 모양이에요. 그때 쓰는 게 다카리? 한번 올라갔잖아요. 거기서 썼는 모양이에요. 그 센반
희한하게 모양을 끊어가지고. 그 희한한 모양을 이렇게 그러니까 지금 말하니까 그 저 희한한 모양으로 끊어가지고 스~
어디다가 쓸까 희한하게 끊으라 하니깐, 끊어서 보냈다고, 또 다른 곳에서도 그랬다고 하더라고.. 그래 그 맷 대
있으니깐 라케트 올라간다고 하더라고요. 아~ 저거 쓰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그런 여러 가지 그런 거, 개인일 있어요.
이: 예~ 미사일. 네 그때 62년에 올라갔어요. 4월 달에. 그때 저희가 스무살이 됐거든요. 스무살이 되니까 집에서
시집을 보내야 된다 해서... 그래 어머니는 나는 딸이 하나니까 절대로 스무살 전에는 안보낸다고 음~ 딸이 찬석하면
아들이 찬주밖에 안 남으니까 안 보낸다고. 그전에 일본시대에요. 말 좀 앞으로 가지만... 요미우리 호께이라고
호케에다가 넣어줬어요. 그 열 여덟살이 되면 그 돈타가지고
돈 타가지고 니 시집갈 때 쓰라고... 그것도 해주는데 이렇게 해방됐으니까 그 조운도 다 망가졌고, 또 그렇게
되뻐리고. 또 시집가는 날에는 또, 어머니가 혼잣말로, 절대로 스무살 전에는 안 보낸다고 그 소리를 내가 들었어.
들었는데 스물 한 살에 지금 남편이가 악단을 가지고 왔어요. 그 촌에다가 악단을 가져와서, 나도 촌에서 어대도 안
나가니까 악단을 처음으로 봤어요. 일본시대에는 하이마콕치라고, 타프하는 배우 있었어요. 그거는 몇 번 봤지만,
악단이라니까 한 번도 못 봤으니까 “아휴 엄마 오늘은 악단 보러 가자”고 “그래 가자” 갔어. 가서 재밌게 봤는데 그
이튿날 또 한다니까 우리 어머니가 이런 촌에 가빠말고 뭐하고 있길래 가기는 가고 분절분절하고 있소 어머니는 그래
인자 어떤 사람이가 우리오빠를 모시고 오디로 갔어. 그 아무개, 아무개. 그 아무개 아무개인데... 당신 네가 여기
보러왔는데 악사가 마음에 들어하는데 악사한테 시집보몬 어떤가 하는데, 우리 큰오빠는 또 얼마나 또 딴지 없이 허락해
버렸는 모양이야. 그래서 어떻게 맛이가...그래 어머니한테도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몇 달을...
그 때 그 사람 있는데, 한 반년 있었어. 전두화이한테 전보가 왔어요. 아무 아무날에 도착한다고 그때 우리 어머니가 그
사람들이, 왜 우리 집에 올라하는가 큰오빠가 하는 일이다. 하면서 그날 올라가서 집에서 야단났지만... 어머니가
아버지 없이 키워가지고.. 그래 할 수 없이 허락하기는 했는데, 그 해에 53년도? 52년도 12월 달에 창제했어요.
창제하고 사할린에 와서 둘이 사는데 창제할 때는 그날 좋은 거를 받아서 와가지고 뭐라 하기를... 집도 있고 뭐있고 뭐
있다 해서 우리 엄마가 안심해가지고... 가보지 않았으니까 근데 와보니까 집은 무슨 집이야. 아무것도 없어...시집보낼
때 우리 어머니가 뭐라 했나 하면, 날보고 저 “고생해도 고생한다 소리하지 말고, 꾼질 꾼질하지 말고 남편한테 잘해라,
잘못하면 아 저거, 애비 없이 큰 아이니 버릇이 없다고 내가 욕 얻어먹는다고...” 찍소리도 못하고 집에 없어도 그만
돈이 없어도 그만 찍소리도 5년 동안 싸우지도 안 했어요.
5년 지내니까 마음이 커져가지고 잔소리했지. 그래 악단하고 일을 하는데 저... 악사 악사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돈도 많이 버는가 해서, 한 달에 그때는 천원이면 큰돈이지요. 한 500원, 600원 그래 밖에 못 받았어... 그거 가지고 몇
달을 살아야 되나 몰랐어요. 그래도 가만히 있었어요. 암말도 안하고 5년 동안. 그래 한 번도...
1956년인가 57년에요. 그 악단이가 파원되버렸어요. 왜 파원됐는가 하몬 대륙에서 온 사람들도 일했고, 또 조선에서
파견 와서 온 사람들도 일했고, 그 악단 이제 그 사람들이 계약을 지냈으니까 또 북한으로 가는 사람은 가고, 또 그렇게
되니까 악사들이 지리지리 흩어지기 시작했어요. 그 파원 되뿌렀어요. 그래, 아저씨가 일할 데가, 남편이 일할 데가
없어요. 기술이 없어요. 남편은 아코디언 밖에 기술이 없어요.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거에요. 저도 걱정됐어요.
정말로...노동일도 못하는 사람이고. 근데 그 해에 마침 사범학교가요. 바라나이스크, 바라나이스크라고 하면 기차 타고
가야 되는데 그 해에 사할린으로 이사 오게 됐어요. 그 사범학교. 그래 제가 남편한테 말했어요. 사범학교 가보라고,
만약에 쓰겠다고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그래, “야~ 저런 나를 써주겠는가?”하고... 우리 남편이 특히 마음이 약한
사람이에요. 남이가 안 된다고 하면 왜 안 되냐 물어보는 사람도 아니에요 아! 그런가 하고 나가는 사람이에요. 그래
가보라고, 그래도 가보라고... 써준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안 쓰겠다 하면 다른 일도 생각하라고 그래서 그날 갔어...
가니까 받아 들인거에요... 우리 남편이가 저.. 그만한 음악가가 없었거든요. 일본시대에서도 일을 했지만 일본사람들도
우리 남편 밑에서 음악했죠. 공부는 고등학교하고 밖에 못했는데, 음악에는 큰 소질이 있던 사람이에요. 거기 가니까
옳소 좋다하고 받아들인거요. 월급은 또 얼마나 많이 줘요. 그때 250원. 최고 월급이에요. 그 이상은 안 줬어요. 그때
또 일을 하고, 학교 선생이라고 받아들였어요. 아이들은 차차, 차차 크게 되가지고, 학교도 다니고 그 때 11학년
졸업하게 되니까 아들을 대학을 보내게 됐어요. 그렇더니 너도 음악을 배우라 하니까 우리 아들 둘이 아들이 둘이가
있는데 큰아들이 음악에 소질이 있는데, 저희 남편보고 큰 애한테 음악 좀 배우면 어떤가 하니까 “아이고 음악이라는 게
안 좋다고... 다른 일, 다른 공부시켜야 된다” 고 그래도 아들이 다 음악 좋아하는데 음악 좀 배우게 해주지 하니까
남편은 반대에요. 지는 가만히 아이들 공부시키는 음악학교에 있었어요. 거기 가만히 1년 동안 보냈어요. 그래 5학년
6학년 11학년 되서 졸업해가지고, 음악학교는 1년만 공부시키고, 그 다음은 고등학교 졸업시키고 대학에 가게 되는데...
대학에 보냈어요.
노보시비르스크라고 러시아 거기에 있어요. 거기 대학에 졸업해가지고 그래, 본적에서 일하게 됐는데, 본청에서 일하게
되니까 친구들도 다 노보시비르스크 일하는거 자기 친구들은 또 공부하고 있는데, 아 보니까 스무 살 조금 넘어가니까
장개가겠다고 야단을 했던 모양이에요 벌써. “동훈아, 동훈아 너 절대 러시아사람한테 장가가지 마라” “마마 러시아
여자랑 장가가면 내 실수라고” 해서 됐다... 러시아 사람한테 장가 안 가고 자기 친구가 결혼하니까 자기도 장개가겠다
한 거여. 그 때 스무살 이에요. 아이고~ 그 가지마 소리도 못하고 가라 소리도 못하고 그냥 찬지 해줬어. 며느리 되는
사람은 또 의학대학에서 공부하는 거에요. 아들은 졸업했는데 아직도 2년 공부해야 돼요. 공부해야 되는데 그 다음에
살면서 아이 하나 생깄어요. 아들 하나 생겨서 아이는 우리들이 키우고 사돈집에서 키우고 그래 키워줬는데, 아 이게 또
2~3년 살다가 안 맞으니까, 마음에 안 드니까 또 갈라지게 됐네요? 갈라지니까 얼마나 또 가슴이 아프요. 또 여기에
돌이가 딱 백힌거 같애요 저 한테는... 또 손자는 얼마나 또 곱소? 손자는 제(저) 있는데서 안 떨어질라하고... 근데
갈라졌으니까 저도 일 다녀야지, 아이도 봐야지, 그러면서 살다가 살면서 있는데... 또 딸이가 또 대학에 들어가게
됐거든요. 딸은 또 영어대학 간다고 영어 잘 하니까 영어대학도 공부시키고. 아들은 그 땅에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공부하니까 그 저 요롭바 포자래요. 알죠 거기? 딸은 그냥 그 자리에서 공부하는 거에요. 그래서 딸보고 나타샤 너 어데
가고 싶은데 있으면 놀러 갔다 오라니까, 응 갔다 오겠다 이래서 수속해주마, 체코슬로바키아 거기 갔다가 왔어요. 거기
갔다 오니까 거기는 영어쓰더라요. 자기가 영어 잘하니까 거기 가니까 그렇게 이뻐했다고. 체코슬로바키아 가니까
크리스탈, 그 크리스탈을 머라 하던디 한국말로? 크리스 크리스탈 있지요 크리스탈 가지고 만든 공장 아니, 미세야
가게. 크리스탈 가게 있는데 크리스탈 팔고, 이런 거(그릇) 크리스탈로 팔고 그러는데 만든 거 파는 거 구경도 하고
왔는데, 또 스무살 딸아이가 스물 두 살 되니까 시집가겠다네 그래서 딸도 시집 보내고 그렇게 있는데 딸 남편은
사범학교 졸업 하긴했는데 같이 살면서 순사일 했어요. 사할린 살면서 순사일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올라가면서.
경찰이 그렇게 되가지고 모스크바로 가게 되었어요. 모스크바도 또 집도 주고 그래서 가게 됐는데 근데 이것이 바람이
나가지고 그전에 아이를 둘을 낳았거든. 바람이 나가지고 자기 살림을 마련한거에요. 그게 98년도 95년도 6년도 7년도
되니까, 영주 귀국한다는 소리가 있어요. 아, 90년도에 페레스트로이카 되니까요 인프라 (인프레 이션)가 생겼어요.
돈이 종이로 되뻐렸어요. 우리 집에 우리 돈 좀 많이 있었거든요. 그게 다 종이로 되뻐렸어요. 그게 종이가 되니까
거짓말이 아니에요. 하늘이 캄캄하게 됐어. 캄캄하게 되니까 그래서 살기가 싫은 거에요 제가. 하루도 살기 싫고 그
돈을 모으려고 얼마나 일을 했는가 싶어서 생각하니까 살기가 싫은거에요. 그래서 딸이 다른 데로 이사가라 다른나라에
가라하면 얼싸 좋다하고 가겠는데 이거,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그때는 또 영주귀국이라도 있으먼 하겠는데
그때는 또 일본사람이가 우리 집에 와서 집의 아들하고 일하고 싶은데 어떻냐고 야마다키상이라고 왔어요.
페레스트로이카 되니까 한국에서도 기업가들 많이 들어오고, 일본에서도 많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일본 사람 우리 집
와가지고, 야마다키상이라고 우리집에 와가지고 통장까지 가지고 와서 내가 돈이 이만한 있는데, 집에 아들하고
사업하고 싶다 어떻게 생각하나. 근데 저금통장은 머하러 가지고 왔나 하니까. 내 재산 있다는 걸 보여드리려고 가지고
왔다. 그러니까 사람이 얼마나 정직하요. 그래서 한번 해 보시오. 야마다키상 우리아들도 정직한 사람이오. 쉽게 안
키웠습니다. 같이 해보면 알거요. 아는 정직하게 키웠으니까 일해보시라고 허락했어요. 하니까 했어요. 했는데 일은 잘
해 나갔어요.
구술자: 김경진(1934년 출생, 함경남도, 사할린)
김경진은 1934년 1월 5일, 함경남도 삼수면 이적목에서 태어났다. 가족 모두가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일본을 거쳐 1년
후인 1941년 6월에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당시 사할린에는 근로자 모집으로 들어온 한국인이 많았는데 김경진의
아버지는 부두 공사를 하는 회사의 사무를 맡았다. 당시 김경진은 누이들과 ‘시마우치’로 성을 바꾸고 학교에 들어갔다.
1945년 해방 후 다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김경진이 살던 부락에는 한인들이 모여 조선민족학교를 세웠다. 애국심이
강한 아버지가 교양 선생님으로 활동하면서 한글을 가르쳤다. 26세가 되던 해 모스크바종합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러시아어가 약해 탄광에서 일하면서 다시 준비를 했고 모스크바가 아닌 까잔항공대학에 진학한다. 대학 졸업 후 전자
기술 설계 전문회사에서 일했다. 사할린으로 돌아온 후 TV와 인공위성을 연결하는 작업기사로 일을 하다가 결혼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김경진은 사할린문화센터라는 조직에서 사할린 한인 예술단으로 활동했다.
2000년대에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여 안산 고향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안산 고향마을에서도 음악 관련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제가 어제 말했듯이 출생은 함경남도, 함흥부, 삼수면, 이적목에서 출생했습니다. 1934년에. 함흥부라고 했지 그때는…
저희 어린 시대 할게요. 저의 어린 시대 여사님 말씀할 때 그런 풍부한 사연 없지만도 첫째로 저 우리 아버님께서 좀
글씨가 있었어요. 배운 것이. 그래서 집에 잘 안 계시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아버님 사할린 갈까요? 마 가자.
아버님과 함께 어디 구경 가거나 그런 일 전혀 없었고 제 우에 누님들이 세 명이나 있었습니다. 또 바로 밑에 누이
있었고. 그니까 아버님이가 집에 잘 안 계시고 여러 군데 이렇게 이동하시고 살아오신 모양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강점,
강점기... 1940년에 우리 아버님과 일본을 거쳐 일본에서 조금 계시다가 사할린 갔습니다. 그 때 막 모집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일년 후에 우리들 이제 가게 됐죠. 식구 나머지 식구가 아버님 따라 사할린. 그래...어........갔을 때
유월 달이었습니다. 그 해 사할린 눈이가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 야 이거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고... 근데
도착해가지고 우리는 인차 그.. 에쓰또르라 했습니다. 에쓰또르 근데 우리 아버님 좀 글씨 있었거든요. 그래. 거기서 그
거기서 그 데스토르 시에 군이 있었어요. 군, 군 보록시라는 게 보록시. 거기, 에... 이것은 부락이었습니다. 거기에
‘키무라 치쿠’라고 ‘키무라 치쿠’라고, 부두로 부두에 관한 공사하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사무를
보게 되셨고, 그래 그 당시에 전문 그라이만도, 일본 일본 혼슈에서, 혼슈라면 어떻게 됩니까? 근로자들 젊은 근로자들
많~이 왔었어요. 그래서 일하고 있었어요. 그래 거기에 무엇을 주로 만든다~? 하면 좋을까요, 만들었냐 만든다고 하면
좋을까요? 그 부두에 쓰는 캐선이란 게 있습니다. 캐선. 캐선이라는 거는 공구 틀 이렇게 크게 만들어서 그것을... 음
그것이 바닥에 뜨게 됩니다. 그게 우리 산 끝 부락에 돌산인가 있었어요. 그래 그것을 먼저 그렇게 해서 원래 월,
에스또르 그 때 부두를 만들고 있었...건가 있었습니다. 거기 다니다가 돌을 거기다가 채워가지고 가라앉혀가지고
부두를 만드는 그런 공사가 있었어요. 그래 제가 어머님 따라서 간 그 시절이가 6월달이었으니까 그 해엔 일본학교에
제가 입학... 다니지 못하게 됐습니다. 다음 해에 국민학교 1학년에 들어갔는데, 그 당시는 제가 우연한 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이름은 김가인데 시마우치라고 탁 이름을 시마우치. 보통 김씨들은 말이예~요. 가네모토,
가네다마 근데 우리 집은 왠지 시마우치라고. 근데 일 년 지났지만도 일본말을 완전히 통역을 같이 말을 못하게 그 정도
안 됐습니다. 바로 위에 누님하고 같은 반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1학기 지나고 2학기 그니까 완전히는
못하지만 따라갈 수 있었고, 그래 1학년 끝나게 되니까 일등을 먹었어요. 그 때 우리 아버님도 처음으로 저더러 야~
기특하다고. 칭찬. 그니까 공부하다가 그때 벌써 세계대전 시작됐습니다. 41년도. 그 해 12월 8일에 그래. 어… 난다?
(일본어) 진주만 공격이 있었죠. 그러나 한 1년, 2년 전쟁이 시작되어서 1년, 2년 동안 괜찮았습니다. 이~ 사할린
섬이란 건 섬은, 지리상으로 북쪽에 있지만도 아주 자원이 풍부한 도시입니다. 첫째로 남쪽에서 북쪽까지 전체
탄광입니다. 석탄이 나옵니다. 재물. 록뎀볼이라 하면 굴 안 파고, 노천광도 있었고 첫째 석탄, 그 다음에 원유, 그
담에 목재 그리고 물론 수산물은 말할 것도 없이 많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전쟁 시작되니까 물론 어... 아주 그
노동력이가 필요했죠. 그래야 우리 한국으로 처음엔 모집, 그 다음에 강제지용(징용)까지 동원했지 않습니까? 우리
젊은이들을. 그래 제가 알기론 보통 본다면 탄광에서 일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철도 길 닦는데, 비행장... 그런
곳에서 많이 중노동 많이 하셨고, 그 다음에 또 제가 되돌아갑니다. 제가 그 학교 시대, 어... 그런... 제가 있는 그...
부락에는 한인? 한인만 뭐라면 좋을까요? 우리하고 또 한 세대가 있었어요. 다~ 일본사람이었고, 그 때 뭐라면
좋을까요? 민족차별주의인가? 그런 것들 하나도 우연히 몰랐습니다. 몰랐고. 그러고 하여튼 우리 집에 식솔이가 그
당시에 벌써.... 어… 사할린 가서 또 세 명 생산했어요. 우리 부모님들. 그니까 모두 8남매 되었습니다. 그렇지만도 뭐
아버님하고 살면서 월남... 잘 모르겠지만도 제가 알기론 강지에 적응시켰어요. 일본 정부에서. 네 그러니까 물론 저는
바빴죠 뭐. 전쟁시작,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음.... 하여튼 그렇게 하여튼 5학년까지 다녔습니다. 어머님은 저희
어머님은 지금 말하는 가정훈련, 그런 입장으로 자식들 맥이고 입히고 한데, 그리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에 해방... 해방 광복절... 그 당시에 그 땐 벌써 제가 좀 나이가 좀 괜찮았기, 열 한, 좀 물건 나르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할 그런 것도 있었고. 그러나 전쟁 끝나니까 우리 집에 재정시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해방운동... 그 있잖아요?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이 활동하신 분들… 많이 갇혀 있었습니다. 전쟁 끝나니까 우리 집
웬일인지 우리집 모이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에 제가 우리말도 할 줄 몰랐고 어렸으니까 또 어르신들이
말씀하신 데 기억할 수도 없고. 그러나 제가 한 가지 알기론 우리 부친님 친구들 아주... 아주 애국심 강했고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래 서로서로 시도 짓~고, 서로서로 뭐라 하면 좋을까요? 이런 거 해주시고 아주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또 소련 정부는 절대적으로 좋아 안 했습니다. 네. 또 다시 그런 분들 몇 명 징용하게 되었습니다. 뭐 그런
일도 있었고. 어... 그러고 전쟁이 끝나니까 제가 바른 자기 성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경진이라고. 예. 어제 제가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아버님 좀 글씨... 배운 것이 있어서 교양 선생님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 부락에
처음에는 딱 두 세대 있었는데 전쟁 끝날 당시에는 많이 왔어요. 몇 집 더 들어왔어요. 그 부락에. 그래, 그
조선민족학교가 생겨 가지고 우리 아버지 저기 아버님께서 글을 가르쳐 주시는데, 제가 거기서 가갸거겨 배웠습니다.
거기서, 예. 그리고 우리 어… 글을 좀 배우기는 배웠지만도, 물론 부족하지요. 또 러시아정부는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좋아 안 했습니다. 처음에는 해방시켜줬다, 자유 언권이다, 뭐... 선정은 아주 좋았습니다. 선정은. 그래 그리고 또 다
누구나 물론하고 함경도나 경상도나 다 자기 나라로 귀국할 것을 원망하고, 소망하고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잘 안
됐지 그렇지 않습니까? 또 그러다가 남하고 북이 또 갈라져 버리고 처음에는 삼팔선이 있었지 않습니까? 38도...
그러니까 남, 특별히 남쪽하고는 연락이가 없어져 뻐리고. 북한은 그 때 소련하고 형제국이라, 동맹국이라 그런 이유로
북한에서는 북한 소식은 잘 알 수 있었고 또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물론 그... 으... 사할린 그
당시에 우리 교포들 한 3만 6천명, 한 4만명? 있었어요. 젊은이들도 물론 다~ 누구나 공부하고 싶었죠. 물론 늙으신
부모님들은 배우지 못한… 보통 보면 배우지 못한 분, 학교 문도 문 앞에도 못 가보신 분들 많았지 않습니까? 그니까
자식들이 어떤 고생이 있어도 꼭 공부시켜야 된다, 되겠다. 누구나 다 그런 마음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자식들도,
우리들도 다 한번 배워야 되겠다. 남에 나라에 사는 것만큼은. 그냥 그 때부터 자연적으로 자기 조국에 대해서
생각나고, 그 언제가나 자기 조국에 한 번은 가겠지 하고. 그러나 가기 전에 꼭 배워야 한다. 그때 그 당시 살기 바빠서
러시아말도 잘 모르니까~ 물론 일 하자 해도, 기술도 없고 배운 것이 없다 보니까 막노동하게 되지요. 어린 나이에 그
때 건축부에 가서 일 하던가, 벌목장에 가서 일 하든가, 일 하면서 저는 건축부에서 저기 일 했습니다. 막노동 많이
했습니다. 목적은~ 조금이라도 돈 벌어가지고 모스크 갈 차비만 있으면 되겠다. 딱 그 생각만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잘 안 되지 않습니까? 아버님도 그 때 겨울 러시아, 소련에서는 겨울이라 하면 우리보다 온도가
낮습니다. 온도가 아주 많이. 그니까 식솔이 많으니까 아버님은 자기는 안다고 저… 너가 공부하고 싶은 것. 그렇지만도
뭐 입장 보고, 어떻게 저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겠는가? (허허) 그런데 어머님이가 자꾸 공부하고 싶어 하는 거 공부
마음대로 놔두는 게 좋지 않겠는가? 우리끼리 상담이 있었습니다. 그래 허가 떨어졌습니다. 저한테. 그래 저가 낮에는
건축부에서 일허고 밤에는 밤일을 했습니다. 노동일. 예. 보이라이뗌 일 했습니다. 그래 가서 낮에 번 돈은 집에다가
바치고 밤에 일한 돈은 제가 모았습니다. 저금했습니다. 그래, 그 그 당시에 그 소련 정부에서 스탈린 저기, 그 담에
후루쇼가 앉게 되었어요. 그 전에또 말린꼬브가 있었지만도. 에… 후르숏시대가 왔습니다. 후루숏시대가 와가지고
사할린에 한인민족학교하고 다 없애버려야한다고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할린에 남겨준 것, 남겨준...
남겨준다는 것은 라디오방송하고 우리말 방송 하루에 한 30분, 그리고 신문사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레닌길로라
했습니다. 지금은 세부루신문이 되었지만. 라디오 방송, 그 다음에 또, 한인 그건 또 후에, 근데 제가 스물 여섯...
여섯 살 때~ 제가 모스크바를 갔습니다. 모스크바 갔는데, 모스크바 종합대학 갔는데 아무래도 러시아 말이 약하죠.
러시아 말이 약하니까 약해서 입대 못했습니다. 저 때는. 다만 그 러시아말 때문에 입대 못 했습니다. 에. 그리고 제가
입대 못하니까 또 로스또란 돈바쓰가 있습니다. 돈바쓰라 함은 소련에서 아주 유명한 탄광지입니다. 탄광지. 그래 거기
가서 일하면서, 다시 대학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대학... 대학. 그 때 생긴 어… 그 모스크바에서 같이 시험 치다가 입대
못한 그 유태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주 친하게 됐어요. 그 분하고. 그 둘이서 로스토 탄광에 가서 일 하면서,
내년에 틀림없이 해보자. 다시. 그런데 아주 영리한 분이신데 유태인으로. 그래 우리 저기 모스크바 갈 필요 없다고.
모스크바보다도 가자이 항공대학이 유명하다. 거기 가보자. 그래 그럼 그렇게 해보자고 나는 그 친구의 말 듣고 하여튼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담배도 술도 안 마이고 춤추러도 안 다니고 영화 보러도 안 다니고, 시간 있으면
그저 공부만. 그 다음해에 그 까자이라는 항공 대학은 어제 제가 말했지요? 그 독일하고 전쟁할 때에 모스코 항공
대학이 까자이 넘어여 갔지요? 거기까지는 독일군이 안 왔어요. 모스카까지는 한 네 키론가 남았어요. 그때 유명한
소련부대 그… 내 이름은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목숨 바치면서 모스크바를 지켰습니다. 유명한 역사적 전통입니다. 근데
그 항공대학교가 그 당시에 그 까잔에 옮겼지요. 그래 그 까잔 항공대학 괜찮으니까 가자. 그래 일 년 지나가지고
갔는데 우리가 입학됐어요. 시험 되가지고. 근데 대학에 입대했지만도 박사님들 강의를 말이 예요, 제가 그 뭐라
합니까? 강의 필기하는데, 영 제 재간으로는 대강대강 하지만도 그 유태인 그 있지 않습니까? 그분은 하도 머리가
좋으니까 딱딱 다~ 써요. 한 말도 안 빠지고. 근데 그걸 제가 집에 와서 그것을 또 베껴쓴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
대학에 그 때 몇 천 명인가? 많이 있었습니다. 큰 대학인데. 보통 보면 러시아사람, 다른 민족은 적어요. 근데 내가
아시아민족 딱 제가 하나예요. 근데 이 박사님 큰 가방 우리 학생들 중에서 누가 이거 읽을 수 있나? 웃으면서 학생들이
다 나를 저를 쳐다보죠. 그래, 거서 또 웃으면서 내 넘어갔죠. 이거 저기 해석해 줄 수 있나? 대강 이런 말 축하문이라
하는데, 아~ 그때부터는 저를 사랑해줬어요. 그래 제가 3학년 대학 3학년까지 어... 그 소련 시대는, 어 자기 돈 안
물고 나라에서 돈이 나오는 게 있습니다. 시세쓰시뻰지 라는 게 나옵니다. 그러나 보통 잘 사는 집안에선 그래도 다
보태주죠. 그러나 우리 집은 형편이 안 되니까. 제가. 그 당시는 정말 제가 뼈하고 가죽 밲에 안 남았어요. 거 빵
또가리 하나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이 박사님이가 그 당시에 이 항공대학이란 소련으로서는 비밀입니다. 전적으로.
비밀. 비밀. 예. 그러고 배운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다음 그것을 다 바쳐야 됩니다. 집에, 기숙사에 가지고 못
가요~. 그런데 그 박사님께서 저한테 니, 한글 조금 아니까 일본에서 가져온 오요부쓰리, 응용물리학, 그 당시에는
옛날입니다. 벌써 50년대 60년대니까. 60년대니까. 그 당시에는 전자 기술에서 처음에는 람파부터, 칸지스타 그 다음에
마이크로 미크로센 도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소련에서는 안 하면 안 된단 말이예요. 그니까 소련에서는 우주성
그렇지 않습니까? 전자계산기 이런 방면에서 미국보단 비교적 떨어졌어요. 소련이가. 근데 그런 재료를 어디서
구해가지고 이것 좀 분해해볼 수 없는가? 오요 부쯔리. 그러니까 참 어려워서 좀 모르겠다고 해 보겠지만도 확실히
자기… 어 뭐라면 좋을까요? 자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아~ 해보라고. 그래 그 사진도 구해가져다 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몇 가지 해줬어요. 그러니까 물론 소련에서도 물론 발달되어있고 어느 정도 되어있었고, 그러고 이~
박사님들은 조금만 그것을 알게 되면 빨라요. 금방. 아 그래도 감사하다고 그때는 저한테 큰~ 돈 줬어요. 그래 제가
3학년부턴 제가, 스뻰지 한 거, 나오는 거 돈이 많이 좀 받았으니까 오히려 제가 그 돈 (사할린) 부모들한테
보내줬어요. 예예... 그렇게... 그래 이 공부하다가 끝날 때는 저한테 아주 훌륭한 그 노, 대학 일 할 때는 꼭 논문
써야합니다. 저는 말이에요. 제시프라터. 우리는 저... 항공대학인데, 또 군 군에 관한 거. 그니까 예를 들어서 니그
있지 않습니까? 전투기? 말린꼬끄 북해도 항공 착륙시켰잖아요? 니그 35번인가? 하여튼 설치하는~ 전자 기술 설계
전문회사입니다. 제가. 그니까 거기서 저를 지도하는 분이가, 그 분도 또 유태인이었습니다. 근데 아주 제게 좋운
테마를 줬습니다. 그것으로 제가 대학 졸업하게 됐습니다. 그래 대학 졸업해가지고 보통, 비밀 설계부가 연대
파견되는데, 저는 거기서 조금 일하다가 제가 장남 입장으로 우리 부모는 제가 절대 러시아여자한테 장가가선 안 된다.
그런 뜻으로 제가 부모님은 또 나이도 많이 잡수시고 하니까. 또 자기 양심으로 또, 부모님 말씀드려야 되겠다.
그래가지고 몇 년 돈가? 하여튼 끝나가지고 몇 년 후에 장가들었습니다. 그래 2남 2녀. 그러고 사할린 와서 보니까
사할린 지산인이 지? 사하린 주... 뭐라 합니까? 우리라면 경기도 뭐라 합니까? 지사? 사할린 주 거기 있습니다. 러시아
그~ 뭐등가, 이름 잊어버렸다~. 하여튼 우리 교포들 좋아 안 했어요. 우리 한인들 좋아 안 했어요. 근데 그게 취직하는
건데 있습니다. 부가. 그래 거 가니까. 당신 이런 대학 졸업해서 왜 사할린 왔는가? 여그서 일 할 것 없다고. 근데 그
당시에 마~침 인공위성을 소련서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테레비 방송. 그 어르비타라 하는데 오르비타. 오르비타
기사로 저를 받아줬어요 하여튼. 그래 사할린 와서 일하... 일하.... 일하는데 정말 너무나 심심하고 배운 것도 쓸모도
없고, 거기 가니까. 다만 거기서 인공위성 지나가는 것 고 다음에 딱 맞춰가지고 테레비 방송 나가게 조절해주면
되니까. 그렇게 몇 년 하다가 또 사할린에서 처음으로 어… 전자 센터 란 게, 전자 회사 센타란 게 뭐라면 좋을까요?
조직되었습니다. 건축... 건축 뭐라 하면 좋을까요? 프로젝터, 건축 프로젝터 그... 원이라 하면 좋을까요? 연구. 그게
컴퓨터가 처음으로 들어왔습니다. 큰~ 컴퓨타 이런 조그만 거가 아니라~. 거기 기사장으로 맡아서 그리고 거기서… 아,
또 사할린 처음 왔을 때 거기 한인들두 많지요. 그 당시는 정말 대학 졸업한 분들이 적었습니다. 비교적으로. 우리
교포들 중에서는. 그래도 제가 일찍이 좀 졸업한 셈이고. 그… 문화주택이라고 말해요. 보통 안 줍니다. 한인들한테는.
그 한인들은 보통 개인집이라고 하면 뭐라 하면 좋을까요? 아, 맞다 개인집 있지 않습니까? 이층집. 근데 거기에 밭 좀
있고, 보통은 옛날 1세대 분들은 그런 집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그냥 해 넘어갈 때 채소와 농사해가지고 그것을 시장에
팔고. 그래 자식들 공부시키는 전적으로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문화주택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우리 친구들 와
반갑다고… 근데 어... 그리고 내가 또 한 가지, 그 당시에 우리 젊은이들은 보통 사할린교민들은 대학가기는 물론 좀
바쁘니까… 첫째로 언어 방면에서도 미약했고, 또 카잔 소련국적이 있어야 좋은 대학에 입학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할린에서는 물론 자기 조국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욕망. 아주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소련 국적도 안 받고 임시
파스폴트 국적 가지고 그냥 계셨습니다. 그런 분들은 자기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했고. 보통 보면 운전수, 기사,
그 다음 사범학교라고 있었습니다. 그 사범학교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녔고, 사범학교 있었고, 그 사범학교는
전문입니다. 전문이니까 중이고, 사범대학도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범대학에도 들어가도 어… 문화부다 이런 데는 바쁘고
그런데 러시아말도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예. 비교적으로. 다른 나라 말보다. 에… 그니까 이... 뭐라면 좋을까요?
자연과학 그런 데서 많이 공부했습니다. 우리 교포들이. 그리고 어... 우리는 사할린 섬이고. 사할린 섬에 있지 않고
대륙을 했습니다. 대륙. 대륙이라 하면 뭐 모스크바든가 하바로스크라든가, 큰 땅. 거기 가서도 그런데 가서도
건축대학인가 그런 데서 좀 많이 공부했고. 그 다음에 농업대학인가 그런 데서도 많이 공부했습니다. 기억이가 좀… 또
작년에 제가 자동차 사고로 한 1년을 고생했습니다. 여기도 터졌고, 그러나 다행히, 피가 많이 흘렸으니까. 지금 살고
있습니다. 운수 나빠 가지고. 그런데 지금 깜빡 깜빡하고 있습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그러고 어… 이 소련이가
붕괴됐습니다. 1990년에. 아 90년은 페레스토레이카. 그니까 그 당시에 그 땐 벌써 제가 연금 나갔어요. 연금생활하고
있었는데, 사할린 유일한 대학 있었어요. 지금은 종합대학으로 되었습니다. 교육대학, 국립교육대학이라고 있었어요.
그게, 제 친구가 거기서 박사, 저 레닌그라드, 상트 뻬쩨르부룩에서 대학 졸업했어요. 그 분이가. 근데 그 분이 사할린
와서, 우리 국립사범대학에서~ 교수, 완전한 교수셨어요. 교수님. 그 사람이 경제과로 하는 분인데 박수호라고. 예…
우리 한인들 중에서는 유명한 분입니다. 그 분도. 그 분이가 저를 저를 부탁했습니다. 제가 연금생활 하고 있는데 저를
도와달라고. 그래서 제가, 사실 말하면 저는 교수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이 저한테 월급을 주기 위해서
학장하고 합의 해가지고 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 제가 전체 대학에서 우리말, 또 일본말, 소련말 제가 다 그 사람들
하는 거 제가, 일본말이나 한글 써가지고 미국을 보내던가, 일본에 보내던가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중국. 그 당시에
제가 그 대학에서 러시아 대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일본말 가르쳐줬어요. 조금씩. 어느 정도. 또 러시아, 일본...
학생들에게는 러시아 말 가르쳐 줬어요. 그런 경험이 좀 있어요. 그래서 사실 전 교수 아닙니다. 어... 그 말 하고
싶었고. 어, 그 다음에 그 당시에 러시아 소련 붕괴되었고, 대한민국하고 수교 맺어지고 우리나라에서도 막~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사범대학에서 일 할 때, 서울 시장님이셨어요. 김현옥씨? 지금 별세하셨지요? 그리고
우리 대학 방문했습니다. 우리 그때 바로 그 박수호선생, 우리가 그 다음에 모스크바 사범대학, 미시코라고 있었어요.
미시꼬. 학장이라 하지요? 대학에. 동양학부 조직하자. 그 때 김현옥 시장님께서 그때는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래
우리들에게 도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또 사할린에 문화센터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한인 문화센터. 제가
거기서 봉사를 했지요. 거기서 사할린 한인 예술단 조직이 됐어요. 저는 음악을 좋아했고, 노래도 좋아했고 그래서
거기서 어느 정도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고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인기가수들 오셨습니다. 굉장했습니다.
어, 스파르타 운동장에 무대를 설치해 놓고 그래, 하바로스크에서 비행기 차 대가지고 한인들 다 모았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현철 가수님, 설운도, 그 담에 주현미 하여튼 많이 왔었습니다. 11명 정도 왔었어요. 그 다음에 그 당시에
하여튼 우리말도 막~ 배우기 시작하고, 아주 활발하게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88올림픽 있은 후에는 러시아에서도
한국이라는 아주 유명한 곳이다. 나라다. 우리를 없이 본다든가 어느 정도, 그런 것들 없어지기 시작하고… 영주
귀국해서 사실 말한다면, 물론 문화주택에 오래도록 다 거주시키고, 안산 고향마을 정착했다 합시다. 그러고 나라에서도
우리 기초 생활 보조금 있지 않습니까? 나오고. 그, 물론 자기 나라서 말이요. 제가 다시 반복 하겠지만도. 더 좋은 거
없어요. 그런데 어… 지금 우리가 다 노화가 아주 심해요. 뭐라 그럴까? 보통 칠십살 팔십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누구나 물론 심한 병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또 급료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니까 보통, 고혈압이라는 것 약 갖다가 무료로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도 노화가 점점 악화되면서 심한 병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는 우리가 병원 가는 그런 입장 안 됩니다. 제가 이번에 퇴원했지만도, 어... 무료급료라는
것이 있지만도, 약은 약은, 예를 들어서 약도 어떤 약은 그거는 저기 보험 안 된다. 그니까 물어라. 어디 예를 들어서,
치매 걸린 그런 노인들 있어요. 물론 한번 다 MRI라는 걸 찍어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 MRI 한번 찍자면 50만원, 60만원
있어야 됩니다. 그런 건 아주 좀 남 문젭니다. 그러고 우리가 처음에 왔을 때는 지금 받고 있는 그... 생활비가 말이
예요, 넉넉했습니다. 넉넉하다기 보다가 충분해. 딱 적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물가가 두 배 삼배는 올랐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방면에서 그렇고. 아무리 우리 형편상 지금 우리가 이중 이산가족 처지에 있습니다. 이중이산.
왜냐하면 사할린에 자식, 못 데리고 왔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 부모들은 다 사할린 산소가 있고,
그러니까 자식으로서 매~년 못 가도 자식으로서 2년이나 3년에 한 번 꼭 가서, 그렇지 않습니까? 충분히 해야 되는데,
그런 입장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니까 그런데 우리 정부에서 국회의원들 팀이 생겨서 특별보안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직도 통과 안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불편한 점이 아직도 좀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뭐 뭐 해도 우리나라 제게는
거의 다른 욕심 없지만도 제 개인적으론 자기 나라에서 와서 이렇게 사니까, 죽을 때까지 살게 됐으니까 이만한
행복이라는 게 없습니다. 참 좋은 게 더는 바랄 것도 없고. 형편은 딱 이래 되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
코리안 아메리칸(2002-2008)
글: 손승현
20세기 한반도를 떠난 사람들 중 미국으로 향한 이들이 있다.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갔기에 추방이나 망명은 아니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보면 이들 역시 타국으로 내몰린 상황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국가는 개인을 보호하지
못했다. 강대국의 눈치를 보기에도 힘겨웠던 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타지로 내몰린 개인의 희생은 보호받지 못했다.
그들은 생존과 자유를 붙잡기 위해 타국을 선택했다. 나는 1950년대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다양한 동포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한국이 아닌 미국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1992년 발생한 LA폭동은 흑인 밀집 지역인 LA 남부 중심가에서 시작해 한인타운으로 급속히 번졌고 5일 만에 58명이
숨지고 2,5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5천여 건 이상의 화재와 무차별적 약탈이 발생하여 폭동 피해 지역은 전쟁터처럼
변했다. LA 폭동이 일어난 지 15년이 지난 2007년, LA 폭동으로 인한 상처가 여전히 한국계 미국인들의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범인이 알려지자 LA 한인사회는 즉각 반응했다.
이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촛불모임과 추모예배에서 희생된 희생자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했다. 미국 한인들은 이
사건이 또 다른 LA 폭동으로 이어질까 염려했다. 일부 미국 언론은 한국인 범인이 저지른 총격사건에 대해 한국인을
특정해서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버지니아 대학 총기 사고에 대하여 정부차원에서 이번
사건에 과민반응을 보였다고 조롱하는 외교적 사안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더 신속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와
미주 한인사회가 이처럼 대응했던 데에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1992년 LA폭동으로 인해 한국계 미국인들은
그들이 힘들게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반응도 한미동맹의 상황을 반영했다.
한국계 미국인의 이야기는 광고를 보고 수백 명의 한국인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인천항에서 출항해 하와이로 떠났던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하와이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한국에서보다 더욱 고되고 힘든 삶이었다. 첫 한국
이민자들은 하와이뿐 아니라 미국의 동부, 서부로 퍼져나갔고, 현재 약 200만 명의 소수 마이너리티를 형성하고 있다.
선대의 희생 속에 이주 3, 4세대 후손들은 아메리칸 대륙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일구며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나는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에 정착한 한국계
미국인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삶에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인생 이야기와 가족사는 한국 정부와 국민 모두가 2007년 한 개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앞다퉈
일어난 모습에서 보이듯 한국의 모순적인 역사를 닮았다. 한국인들은 20세기에 세계무대로 이주했다. 재미교포의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통찰력과 근간을 제공한다.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코시안과의
유사점을 찾아보며 그들의 말을 듣고 기록한다.
코리안 아메리칸 – 과거와
현재를 잇는 얼굴들
정가영 (UC Davis, 아시안아메리칸학과 교수)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 집단)가 형성되어 있는 국가이다. 이 곳에서 코리안
아메리칸 커뮤니티는 그 이민 역사가 100년에 달하는 이민자 4세대 가족부터, 반복적 월경(越境)을 통해 근대적 국민
국가의 국경 개념을 허물고 있는 초국가적 이주자 (transnational migrants)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을 지닌
구성원들로 역동적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미주 한인 사회는 일본의 식민 지배,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냉전,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 질서의 재편성, 교육을 통한 초국가적 이동성 확대 등 미국과 한국 양국 사이의 역사적, 정치
경제적 변화 뿐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일어난 다양한 전환과 호흡하며 그 발자국을 만들어 왔다. 국경을 넘는
사람과 물건, 자원의 이동으로 대표되었던 이주의 시대를 지나 오늘날 디지털 통신망의 발달이 가져 온 문화와 취향의
실시간 전파와 유통의 시대를 맞이하게 됨에 따라 미국 사회에서 ‘한국성’(Koreanness)의 의미는 그 어느 때 보다
다층적이고 다양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재미 한인 이민자들의 역사는 미국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겪은 박해와 착취의 역사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
미국으로의 대규모 한인 이주가 처음 이뤄진 것은 1903년 1월 13일, 약 120 여 명의 한인이 하와이 섬에 도착한 것이 그
시발이다. 1600년대에 아메리칸 인디언이 거주하는 아메리카 땅에 정착민 식민주의(settler colonial) 국가를 건설한
유럽계 이민자들은 수 세기에 걸쳐 원주민으로부터 아메리카 본토를 빼앗았고, 뒤이어 1898년에 하와이 제도를 강제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계 미국인들은 하와이 원주민들의 영토와 권리를 빼앗고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했다.
초기에는 중국계 이민자들을 고용하여 농장 경영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했으나, 1882년 중국인 배제법 (Chinese
Exclusion Act of 1882)으로 인해 중국인 노동력 활용이 어려워짐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이주 노동자를 확보하여 그
공백을 메웠다. 그러나 사탕수수 농장에 만연한 노동 착취와 인종 차별주의 및 노예와 같은 대우로 인해 중국계 및
일본계 이민자들은 노동 쟁의를 전개하게 되었고, 이에 농장주들은 이들을 대체할 새로운 인력을 찾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외교관,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호레이스 뉴튼 앨런(Horace Newton Allen)은 이 공백을 메우고자 하와이 이민자
모집 공고를 발표했고, 이는 한국 최초의 대규모 하와이 이주로 이어졌다. 일한 만큼 임금과 토지를 받을 수 있다던
광고와 달리, 하와이의 한인 이민 노동자들은 이름 대신 목에 걸린 번호표의 숫자로 불리고 헛간에서 가축 처럼 먹고
자며 인종 차별과 물리적 폭력, 노동 착취를 겪게 되었다.
하와이 제도로의 노동 이주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 미국 본토에는 조선으로부터 온 초기 유학생들의 행렬도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02년 미국 유학을 떠난 안창호 선생이다. 그가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하는 길에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장엄한 섬들—바로 하와이 섬이다—을 보고 감명을 받아 큰 뜻을 세우고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안창호 선생을 비롯하여 샌프란시스코, 리버사이드 등 캘리포니아에서 유학
중이었던 젊은 유학생들은 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특히 안창호 선생은 리버사이드의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하며 독립 기금 마련을 위해 애썼고, 캘리포니아 곳곳에서 한인 이민자들을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
기반을 넓혀 나갔다.
1947년부터 1991년까지 지속된 냉전(Cold War)은 미주 한인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 전쟁을 거치며
미주 한인 사회는 기존의 노동 이민자, 유학생에 이어 전쟁으로 인한 고아 입양인, 주한 미군과 한국 여성의 국제
결혼으로 이뤄진 새로운 이민 가정의 형성 등을 통해 더욱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냉전이 지속되면서 미국은 과학
기술 인력 확보에 열을 올렸고, 이를 목적으로 우수한 학력과 과학 기술을 갖춘 이민자들을 대거 수용하는 개정 이민
국적법 (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Act of 1965)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대규모 합법
이민으로 이어졌다. 특히 대학 학사 학위를 갖고 있고 이공계 업종에 종사하고 있던 한국인의 가족 이민이 대폭 확대
됨에 따라 재미 한인 사회의 규모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캘리포니아, 뉴욕, 일리노이 등지에 코리아타운을
형성하며 한인 사회의 새로운 모습을 다져 나갔다.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백인 우월주의 (white supremacy)와 인종 차별이 촉발한 1992년에 발생한 로스엔젤레스 봉기
(1992 Los Angeles Uprising)는 재미 한인들의 인종적 정체성 형성과 정치권 강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80년대부터 법적, 문화적 배제를 겪으며 고착화된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의 차별적 인종화와 그림자 속에서, 한인
사회는 정치적 저항 보다 자조 및 학문적, 경제적 성공을 통해 안정적 삶을 확보하는 데 골몰해 왔다. 그러나 1992
로스엔젤레스 봉기 동안 미 정부가 한국계 이민자들의 안전과 경제적, 물리적 손실을 묵과하고 백인 주거 지역의 보안에
급급한 것을 목격하며, 또 다른 유색인종—특히 흑인 커뮤니티—가 지닌 고통과 분노를 마주하며 정치적 전환점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한인 사회 내에서 미국의 다른 인종적 타자들과 연대를 추구해야 하는 것에 대한 각성이 일었고,
커뮤니티의 정치적 힘을 키워 인종적 소수자(racial minority)로서의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동의가 모아졌다.
이는 한인 사회의 정치적 조직화 및 한인 이민자 중심의 사회 단체의 형성의 가속화로 이어졌다. 그 결과, 200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코리안 아메리칸 정치인들의 활약이 전 방면에 걸쳐 확대 되었으며, 지역 커뮤니티에 기반한 한인
사회 단체의 역량과 영향력 또한 꾸준히 신장되고 있다.
120년 이상의 코리안 아메리칸 사회는 현재 또 다른 변화의 기점을 맞이하고 있다. 재미 한인 타운의 경제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들 뿐만 아니라 조선족 이민자, 북한 이탈 주민 등 다양한 배경의 이민자와 난민들의 참여로
더욱 다양화 되는 추세이다. 케이팝, 케이드라마, 케이 영화 등의 잇단 성공이 가져온 미국 내 한국 대중 문화의 위상
변화 또한 한인 사회를 크게 고무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더욱 두드러진 흑인
생명 운동 (Black Lives Matters)과 아시안 혐오(Asian Hate) 등의 사회 현상은 한인 커뮤니티로 하여금 인종적 소수
집단으로서의 위치와 역할, 책임에 대해 새로이 질문하고 성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지금 재미 한인 한인 사회는
인종(race)과 민족적 배경(ethnicity)를 뛰어 넘어 사회적으로 타자화된 다양한 집단들과의 공존과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오랫동안 코리안 아메리칸 커뮤니티를 형성해 온 한인들의 얼굴과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을 통한 이들과의 만남과 교류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갈 내일의 더 나은 그림을 그리고 완성해 나가는 데 큰 귀감이 될 것이다.
조선학교에 관하여
송기찬
(일본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 영상학부 시각 인류학 교수)
2006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 이후, 한국 사회에도 조선학교가 재일동포들의 민족학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본에서 차별과 배제에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우리 민족의 말과
문화를 지켜나가는 조선학교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개중에는 북한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조총련이
운영하는 학교라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선이 남과 북이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의 정치 현실 속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만, 해방 후에도 여전히 식민지배를 경험하고
있는 재일동포의 역사와 문화를 상대적으로 생각한다면, 남북간의 정치적 대립을 넘어서 재일동포의 역사 속에서
조선학교를 이해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학교는 해방직후 재일동포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국어 강습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임시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지던 국어강습소는 해방 후 결성된 재일동포 조직에 의해 점차 체계적인 학교로
성장하게 되어, 1946년에는 525개의 초급 학교(아동 42,182명, 교사 1,022명), 4개의 중급 학교(학생 1,180명, 교사
52명), 12개의 청년학교(학생 714명, 교사 54명) 를 가진 민족학교 네트워크로 성장하게 됩니다. 초기의 민족학교는
독자적인 조선어 교과서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매우 적극적인 교육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당시의
점령군 사령부는 이러한 초기 민족학교의 폭발적인 성장을 치안 위기로 판단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점령군 사령부의
이념적 편향과 일본인들의 민족감정이 있었습니다. 결국 일본정부는1948년 10월 ‘조선인학교폐쇄령’을 내려 경찰력을
동원하여 폭력적인 방법으로 초기 민족학교의 숨통을 끊어 놓습니다.
이후 한반도의 전쟁 등 혼란기를 거쳐 조총련이 결성되고 조총련을 중심으로 조선학교는 조금씩 재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초기 민족학교에서 일본에 의한 탄압정책을 경험한 재일동포들이 새로 지은 민족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일본정부의 간섭을 근본적으로 피하려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은 일본사회에서 분리된 교육 공간의
확보라는 방향성으로 구체화됩니다. 이러한 방향성은 이후 조선학교가 일본 정부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각종학교’로 자리잡는 배경이 됩니다.
조총련이 주도한 조선학교 재건사업에는 북한의 경제적 지원이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북한은1957년 당시의 금액으로
1억 2000만엔이라는 거액의 교육원조비를 보내왔는데, 당시 북한은 전쟁후의 복구사업이 한창이어서 국가 재정에 여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막대한 교육원조비를 보냈다는 사실에 재일동포들은 감격했습니다. 이 경험은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 재일동포에 대해서 기민정책으로 일관했던 남한의 이승만 정권보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의
도덕성을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사회에서의 교육적 자치 공간을 꿈꾸는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는 조국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실질적인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결정적인 기회였습니다.
교육원조비에 힘을 얻은 조총련은 조선학교 건설에 박차를 가합니다. 1966년에는 일본 전국에 학교 수는142개교로
늘어났고 학생 수는 34,000명을 넘을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의 배경에는1959년부터 시작된 귀국
운동(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조선학교의 교육내용은 조국(북한)으로의 귀국을 위한 준비
교육 이라는 성격이 가장 컸으며 이러한 경향은 귀국사업이 끝나는 19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통해서 조선학교의 교육은 형식적인 면에서 북한의 교육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재일동포들의 일본 정주 경향이
본격화되는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일본에서의 삶을 염두에 둔 교육내용으로 서서히 변화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2017년 현재 조선학교는 일본 전국 28개의 행정구역에 102개교(부설 학교가 많아서 주소기준으로는 66곳, 그중 5곳은
휴교 중)를 운영 중이며, 학생수는 6,185명으로서 전성기의 1/7도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구성 측면에서
보면 조선학교는 유치원부터 초급학교(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 중급학교, 고급학교, 대학까지 갖추고 있는 일본에서
가장 큰 외국인학교 조직이며, 남과 북을 떠나 우리 민족이 타국에 설립한 최대의 교육 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오늘날 하나의 민족적 자산으로서 조선학교를 바라볼 필요성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재일동포의 역사 속에서 조선학교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조선학교를 “북한의 주도로
생겨나 북한을 맹종하는 학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 싶습니다. 물론 현재의 조선학교 성립에 북한이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지만, 조선학교는 재일동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재일동포의 민족학교 입니다.
그리고 고교무상화와 유치원보육원무상화 제도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하는 최근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차별정책에서 보듯이
1948년의 조선인 학교 폐쇄의 역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일동포의 역사는 그들을 민족주의적
투쟁의 장으로 소환하고 있습니다.
해방 전후를 살아온 재일동포 활동가들은 보다 큰 이념에 기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일본인들과의 연대를 꿈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대는 일본인의 민족주의적 배제 앞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조선학교라는 분리주의적 교육
공간은 이러한 연대가 좌절된 경험에서 반동적으로 구축된 재일동포의 민족주의가, 일본이라는 국민국가 속에서 차별에
대항하기 위해 ‘조국’ 으로 눈을 돌리는 과정에서 북한의 국가주의적 교육을 받아들여 교육의 기본 체제로 만든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생의 특징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선학교가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국가주의’에 근거한 교육현장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북한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무서운 곳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학교의 현장에 들어가 관찰해보면 그러한 집단주의적이고 국가주의의 담론이 사실은 외부의 시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교육과정에서 보이는 ‘국가주의적 담론’이 말 그대로
원리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도 실질적으로 국민국가의 성원인 적이 없었던 재일동포들에게 ‘국가’를
경험하게 하는 ‘가상의 공간’이자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조선학교 특유의 문화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조선학교 특유의 문화는 그 물적 토대가 되는 교육과정에서의 공통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공통성은
전국의 조선학교에 통일된 교육환경을 구축합니다. 조선학교 교육 환경은 통일된 교육이념과 자체 제작한 공통 교과서의
사용, 자력으로 양성한 교원과 그들의 신념과 희생, 교복으로서의 치마저고리와 같은 일상적 구별의 실천, 그리고
‘조국’과의 관련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종의 ‘국민교육’ 으로서 전국적으로 통일된 조선
학교의 교육환경은 조선학교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 공통된 경험을 제공하고 조선학교를 하나의 ‘경험의 공동체’로
이끌어 줍니다. 이러한 경험의 공동체 속에서 조선 학교의 학생들은 매일매일 치열한 일상을 보내고 하루하루 성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러한 일상적 실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에서 보이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해맑은 미소는 이러한 치열한 일상적 실천이 만들어낸 긍정적 자아가 꽃처럼 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학교에 관하여
송기찬
(일본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 영상학부 시각 인류학 교수)
2006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 이후, 한국 사회에도 조선학교가 재일동포들의 민족학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본에서 차별과 배제에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우리 민족의 말과
문화를 지켜나가는 조선학교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개중에는 북한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조총련이
운영하는 학교라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선이 남과 북이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의 정치 현실 속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만, 해방 후에도 여전히 식민지배를 경험하고
있는 재일동포의 역사와 문화를 상대적으로 생각한다면, 남북간의 정치적 대립을 넘어서 재일동포의 역사 속에서
조선학교를 이해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학교는 해방직후 재일동포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국어 강습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임시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지던 국어강습소는 해방 후 결성된 재일동포 조직에 의해 점차 체계적인 학교로
성장하게 되어, 1946년에는 525개의 초급 학교(아동 42,182명, 교사 1,022명), 4개의 중급 학교(학생 1,180명, 교사
52명), 12개의 청년학교(학생 714명, 교사 54명) 를 가진 민족학교 네트워크로 성장하게 됩니다. 초기의 민족학교는
독자적인 조선어 교과서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매우 적극적인 교육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당시의
점령군 사령부는 이러한 초기 민족학교의 폭발적인 성장을 치안 위기로 판단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점령군 사령부의
이념적 편향과 일본인들의 민족감정이 있었습니다. 결국 일본정부는1948년 10월 ‘조선인학교폐쇄령’을 내려 경찰력을
동원하여 폭력적인 방법으로 초기 민족학교의 숨통을 끊어 놓습니다.
이후 한반도의 전쟁 등 혼란기를 거쳐 조총련이 결성되고 조총련을 중심으로 조선학교는 조금씩 재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초기 민족학교에서 일본에 의한 탄압정책을 경험한 재일동포들이 새로 지은 민족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일본정부의 간섭을 근본적으로 피하려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은 일본사회에서 분리된 교육 공간의
확보라는 방향성으로 구체화됩니다. 이러한 방향성은 이후 조선학교가 일본 정부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각종학교’로 자리잡는 배경이 됩니다.
조총련이 주도한 조선학교 재건사업에는 북한의 경제적 지원이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북한은1957년 당시의 금액으로
1억 2000만엔이라는 거액의 교육원조비를 보내왔는데, 당시 북한은 전쟁후의 복구사업이 한창이어서 국가 재정에 여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막대한 교육원조비를 보냈다는 사실에 재일동포들은 감격했습니다. 이 경험은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 재일동포에 대해서 기민정책으로 일관했던 남한의 이승만 정권보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의
도덕성을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사회에서의 교육적 자치 공간을 꿈꾸는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는 조국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실질적인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결정적인 기회였습니다.
교육원조비에 힘을 얻은 조총련은 조선학교 건설에 박차를 가합니다. 1966년에는 일본 전국에 학교 수는142개교로
늘어났고 학생 수는 34,000명을 넘을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의 배경에는1959년부터 시작된 귀국
운동(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조선학교의 교육내용은 조국(북한)으로의 귀국을 위한 준비
교육 이라는 성격이 가장 컸으며 이러한 경향은 귀국사업이 끝나는 19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통해서 조선학교의 교육은 형식적인 면에서 북한의 교육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재일동포들의 일본 정주 경향이
본격화되는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일본에서의 삶을 염두에 둔 교육내용으로 서서히 변화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2017년 현재 조선학교는 일본 전국 28개의 행정구역에 102개교(부설 학교가 많아서 주소기준으로는 66곳, 그중 5곳은
휴교 중)를 운영 중이며, 학생수는 6,185명으로서 전성기의 1/7도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구성 측면에서
보면 조선학교는 유치원부터 초급학교(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 중급학교, 고급학교, 대학까지 갖추고 있는 일본에서
가장 큰 외국인학교 조직이며, 남과 북을 떠나 우리 민족이 타국에 설립한 최대의 교육 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오늘날 하나의 민족적 자산으로서 조선학교를 바라볼 필요성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재일동포의 역사 속에서 조선학교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조선학교를 “북한의 주도로
생겨나 북한을 맹종하는 학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 싶습니다. 물론 현재의 조선학교 성립에 북한이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지만, 조선학교는 재일동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재일동포의 민족학교 입니다.
그리고 고교무상화와 유치원보육원무상화 제도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하는 최근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차별정책에서 보듯이
1948년의 조선인 학교 폐쇄의 역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일동포의 역사는 그들을 민족주의적
투쟁의 장으로 소환하고 있습니다.
해방 전후를 살아온 재일동포 활동가들은 보다 큰 이념에 기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일본인들과의 연대를 꿈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대는 일본인의 민족주의적 배제 앞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조선학교라는 분리주의적 교육
공간은 이러한 연대가 좌절된 경험에서 반동적으로 구축된 재일동포의 민족주의가, 일본이라는 국민국가 속에서 차별에
대항하기 위해 ‘조국’ 으로 눈을 돌리는 과정에서 북한의 국가주의적 교육을 받아들여 교육의 기본 체제로 만든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생의 특징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선학교가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국가주의’에 근거한 교육현장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북한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무서운 곳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학교의 현장에 들어가 관찰해보면 그러한 집단주의적이고 국가주의의 담론이 사실은 외부의 시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교육과정에서 보이는 ‘국가주의적 담론’이 말 그대로
원리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도 실질적으로 국민국가의 성원인 적이 없었던 재일동포들에게 ‘국가’를
경험하게 하는 ‘가상의 공간’이자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조선학교 특유의 문화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조선학교 특유의 문화는 그 물적 토대가 되는 교육과정에서의 공통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공통성은
전국의 조선학교에 통일된 교육환경을 구축합니다. 조선학교 교육 환경은 통일된 교육이념과 자체 제작한 공통 교과서의
사용, 자력으로 양성한 교원과 그들의 신념과 희생, 교복으로서의 치마저고리와 같은 일상적 구별의 실천, 그리고
‘조국’과의 관련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종의 ‘국민교육’ 으로서 전국적으로 통일된 조선
학교의 교육환경은 조선학교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 공통된 경험을 제공하고 조선학교를 하나의 ‘경험의 공동체’로
이끌어 줍니다. 이러한 경험의 공동체 속에서 조선 학교의 학생들은 매일매일 치열한 일상을 보내고 하루하루 성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러한 일상적 실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에서 보이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해맑은 미소는 이러한 치열한 일상적 실천이 만들어낸 긍정적 자아가 꽃처럼 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술노트
(Technical Notes)
사진 작업을 진행할 때 촬영하는 피사체에 따라 적합한 사진기를 고르게 된다. 나에게 있어서는 현장에서 피사체와 직접
대면했을 때 본능적으로 촬영이 빨리 이루어지는 조작의 간편함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거리에서 촬영한 사진과
정교하게 밝은 빛으로 만드는 초상, 그리고 시간을 가지고 긴 시간 응시하며 촬영하는 풍경 사진들은 적합한 카메라가
필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의 카메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되는 상황도 종종 일어난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
8년간 촬영된 사진들 오만여 장 중에서 사진들을 선별했다. 사진을 촬영하는 것만큼이나 촬영한 사진들을 되돌아
살펴보고 하나의 주제로 편집하는 과정은 의미를 강조해주고 어떤 의미를 전달할지가 분명해진다. 전시와 사진집을
만드는 과정은 낱장의 사진이 하나의 주제로 묶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전시 보다는 보다 많은 내용을
중첩되게 다룰 수 있는 사진집이나 온라인 매체를 보다 선호한다.
사진기를 선택할 때는 여정과 피사체에 따라서 카메라가 결정된다. 이번 작업에서 카메라를 정하는 기준은 조작이
간단한 것들, 순간을 잡을 수 있는 카메라가 우선이었다. 그리고 주변 도움이 있을 때 여분의 중형 필름 카메라나
조명을 사용해서 초상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스냅촬영은 Sony A7R, Zeiss Sonnar T*35mm을 사용하다가
2016년경부터는 Leica X를 사용했다. 라이카에서 가장 조작이 간단하고 35밀리 고정렌즈로 만들어진 이 카메라는
움직이는 피사체를 담기에 아주 좋았다. 특히 흑백사진에 잘 맞는 톤을 표현해 주었다. 초상사진은 대부분
핫셀블라드(Hasselblad 553ELX)를 사용했고 클로즈업 사진은 80mm Carl Zeiss planar와 120mm Carl Zeiss Makro
Planar를 사용했다. 환경과 초상이 함께 나오는 사진은 40mm Carl Zeiss Distagon Lens와 Carl Zeiss Distagon
T*50mm를 교차 사용했다. 때로 초상 촬영에 사용한 전기 플래시는 Profoto 7B와 여행에 가지고 다닌 Profoto Acute
B600 조명을 사용했는데 배터리로 충전하는 방식이다. 작고 광량은 아주 강해서 야외에서 깊은 심도로 촬영이 가능했다.
2015년 〈70년 만의 귀향〉 여정에는 촬영 여건이 매일 변해서 안정적인 기록을 위해서 플레시(Nikon SB900)를 달고
촬영했다. 편집때 크로핑 등을 염두에 두었기에 큰 로우파일(Raw File) 저장이 가능한 니콘 D810을 사용했다. 렌즈는
24-70mm 줌 렌즈 하나로 모든 일정의 촬영을 진행했다.
삼각대(Gitzo GT2542)는 예비로 가지고 다녔으나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 사용했던 필름 카메라 Hasselblad와 Mamiya7, 43mm, 65mm, 80mm를 이번 전시작업에도 사용했다. 이
카메라들은 모두 초점을 수동으로 맞추는 방식이다. 필름 카메라를 아직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뷰 파인더에 오랜
기간 적응된 내 눈 때문인데 촬영을 할 때 원하는 모습으로 편안하게 촬영을 진행할 수 있다.
중형 카메라에는 흑백, 컬러 필름을 모두 사용한다. 흑백필름은 코닥 트라이 엑스(Tri-x)필름을 사용했고 컬러필름은
코닥 포트라 Portra 160NC를 선호한다. 트라이 엑스 필름은 D-76 현상액을 물과 1:1로 희석해서 사용했다. 이 현상법은
긴 현상시간으로 인한 여러 단계의 흑백톤을 얻는 데 효과적이다. 컬러필름은 C-41현상을 한 뒤 밀착인화로 만든 후
사진을 골라낸다. 흑백필름은 현상 후 밀착인화를 한 후, 11×14인치 인화를 하는데 코닥 덱톨 현상액(KODAK Dektol)을
물과 1:2로 희석해서 사진을 인화한다. 인화지는 일포드 멀티그레이드 화이버 베이스 인화지(ILFORD Multigrade
fiberbase paper)를 사용했고 흑백인화는 베셀라45 (Beseler 45MXT)와 로덴스톡 로다곤(Rodenstock Rodagon) 80mm
렌즈를 이용하여 인화했다.
디지털 이미지는 사진이 선택되면 아도비 로우(Adobe Raw)와 아도비 포토샵(Adobe Photoshop)을 이용해서 디지털
리터칭을 진행했다. 이번 전시에 들어간 사진들은 필름 사진과 디지털 사진이 뒤섞여 있다. 필름 사진들은 이마콘
스캐너(Imacon flextight scanner)를 이용해서 필름 스캔 후 어도비 포토샵으로 처리했다.